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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순수한 희생자 아닌 부역자 가린다”는 말이 가리키는 것

등록 2023-06-16 08:59수정 2023-06-16 09:33

[현장에서]
15일 오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피학살자유족회) 회원들과 간담회를 하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1소위 위원장 이옥남 상임위원(가운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가 한국전쟁 사건에 권한을 행사할 만한 최소한의 소양과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케 했다. 고경태 기자
15일 오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피학살자유족회) 회원들과 간담회를 하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1소위 위원장 이옥남 상임위원(가운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가 한국전쟁 사건에 권한을 행사할 만한 최소한의 소양과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케 했다. 고경태 기자

“그런 분들은 저희는 순수한 희생자라고 보는 거예요.”

이옥남 상임위원이 말했다. 그는 ‘순수한’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순수한 희생자란 무엇인가. ‘양민’이라는 말이다. 선량한 시민을 죽여서 문제라는 말이다. 동시에 순수한 희생자가 아닐 경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희생자에도 등급이 있다는 말이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피학살자유족회, 회장 윤호상) 회원 9명이 15일 오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찾아 1소위 위원장인 이옥남 상임위원과 간담회를 열었다. 1소위 위원장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와 진실규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자리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한국전쟁 사건에 권한을 행사할 만한 최소한의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케 했다.

순수…순수…‘순수한 희생자’라는 말

이날 피학살자유족회원들은 1시간 20분동안 여러 질문을 했다. 전남 지역의 학살 사건이 여순사건(여순사건 실무위원회 소관)과 겹쳐 이관통지가 원활하게 되지 않는 점, 조사가 지지부진하거나 조사 이후 진실규명 결정 통지가 미뤄지는 점 등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보상은 부정의”라는 김광동 위원장의 지난 9일 영락교회 발언과 관련해 “김광동 위원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윤석열 퇴진운동을 벌이겠다”는 말도 나왔다.

이옥남 상임위원의 인상적인 답변은 부역혐의자에 대한 질문에서 나왔다. 맹억호 아산유족회장은 이옥남 1소위 위원장의 5월25일 기자간담회 발언을 문제삼으며 “한국전쟁 중에 군경과 우익단체가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고 아무러 법적 절차도 없이 젖먹이와 어린아이까지 무참하게 학살시켰는데 이제 와서 부역혐의 희생자들에게 혐의가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겠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이옥남 상임위원은 “부역혐의자와 부역자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순수한 농업에 종사하시는 분들, 국민들 중 인공 치하에서 협박을 하니까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담을 하신 분들은 부역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상임위원은 “그런 분들은 순수한 희생자라고 본다. 그 부역 혐의자들이 억울하게 적법 절차 없이 순수한 민간인이 희생된 경우에는 진실 규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6.25 전쟁 당시에 동기가 어쨌든 적의 편에 가담을 해서 우리 국민이나 군경을 학살을 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은 혐의자가 아니고 부역자다. 그래서 이런 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 위원들마다 생각이 다르다. 어떻게 그 사건을 처리해야 할지 아직 논의하기 직전”이라고 덧붙였다.

15일 오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피학살자유족회) 회원들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이옥남 1소위 위원장이 간담회를 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15일 오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피학살자유족회) 회원들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이옥남 1소위 위원장이 간담회를 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특조령 따른 사형집행도 인권침해지만 판결문은 남겨

이옥남 상임위원은 “위원들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말 속에 부역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숨겼다. 하지만 부역혐의자와 부역자를 나누면서 마치 부역자는 죽여도 되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한 뉘앙스를 비쳤다. 이 말은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이 상임위원은 아마 본인이 이 말을 해서는 왜 안되는지도 모를 것 같다.

법무법인 해마루의 임재성 변호사는 “진실화해위는 공권력의 인권침해를 밝혀내고 인정하는 기관이다. 즉 공권력 행사의 불법성만 판단하면 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이번 발언은 피해자가 인권침해를 당할만한 사람이었는지 살피겠다는 거다. 진실화해위 설립 취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의 형식으로 제정·공포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특조령)은 부역자를 처벌하는 법률이었다. 1950년 11월8일까지 1298명이 부역혐의로 사형 집행됐다. 단심제와 단독판사제로 부역자를 처벌한 특조령의 조항들은 헌법에 명기된 기본권을 침해한 엉터리이기는 했으나, 약식으로 쓴 판결문이라도 남았다. 이 법률의 인권침해는 2기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전시 군대에서의 즉결처분도 마찬가지다. 육군본부 훈령에서 분대장 이상에게 즉결처분권을 부여했다지만 모두 위헌적인 규정들이었다.

하물며 법률도 없고 훈령도 없는 민간인 학살은 더더욱 아무 명분이 없었다. 희생자의 부역 여부를 정하는 기준이 불명확하고 현실성도 없지만, 이옥남 상임위원의 말대로 설령 부역자로 판명나면 아무 절차도 거치지 않고 산에 끌고가 총쏴 죽이고 묻어버린 게 용납되는가. 무고한 죽음이거나 순수한 희생자여야 억울한 게 아니다. 그냥 가해집단의 불법행위였을 뿐이다.

“북한을 주적으로” 진실화해위 정체성 바꾸는 중

이옥남 상임위원의 발언은 김광동 위원장을 빼닮았다. 두 사람은 진실화해위의 강력한 권한을 움켜쥐고 프레임을 바꾸고 있다. 국가의 인권유린과 폭력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세운 진실화해위를, 북한을 주적으로 삼아 투쟁하는 국가기관으로 탈바꿈시키는 모양새다.

김 위원장은 영락교회에서 했던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전쟁상태를 평화상태로 만들기 위해 초래시킨 피해”라는 망언만으로 민간인 학살 유족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망언이 제도화될 위험에 있다. 국정원 대공수사3급 공무원 출신을 조사1국장으로 사실상 내정했다는 보도에서 그 징조를 알 수 있다. 이옥남 상임위원은 국정원 출신이 조사1국장으로 오면 부역자 심사가 제대로 되겠다며 기대하고 있을까.

진실화해위는 김 위원장이 1억3200만원 운운했던 것처럼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하는 곳이 아니다. 과거 사건을 조사하고 진실규명 하는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옥남 상임위원은 지금 민주주의가 진실화해위에서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순수한 희생자’처럼 아이러니한 말이 없다. 이 말처럼 순수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말이 없다. 김광동 위원장과 이옥남 상임위원은 차라리 진실화해위를 국정원 하부기관으로 편입시키자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제안하기를 바란다.

15일 오후 임홍빈 당진군 유족회 회장(왼쪽부터)과 맹억호 아산군 유족회 회장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입주한 서울 중구 퇴계로 남산스퀘어빌딩 앞에서 김광동 위원장의 영락교회 망언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맹억호 회장 제공
15일 오후 임홍빈 당진군 유족회 회장(왼쪽부터)과 맹억호 아산군 유족회 회장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입주한 서울 중구 퇴계로 남산스퀘어빌딩 앞에서 김광동 위원장의 영락교회 망언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맹억호 회장 제공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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