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픽션 : 본헌터㉓] 유족회장 장호 진실규명 신청하고, 유족회 만들고, 유해발굴 예산 지원받고, 드디어…
발굴단은 산 비탈 전체에서 길이 10m, 폭 1.5m의 표토층 12곳을 파헤치며 단 하나의 뼈라도 찾아보려고 했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장호다.
2005년 12월12일, 나는 역사적인 문서를 작성했다.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국가기관에 신청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반세기가 넘은, 53년 만의 일이었다.
그날 나는 아침 일찍 4호선 쌍문역에서 전철을 타고 충무로역에 내렸다. 4번 출구로 나와 매경미디어 건물로 들어갔다. 2층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라는 낯선 이름의 기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판도 없었다. 열흘 뒤 현판식을 한다고 했다. 나는 한국전쟁기에 충남 아산에서 군경의 학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다.
“주민등록번호 : 42XXXX-1XXXXX, 사건과의 관계 : 희생자의 자, 신청의 취지 : 6.25 동란 중 원인 모를 사망으로 생각하여 진실규명을 신청합니다.”
볼펜으로 기본 항목들을 작성하고 인우보증서와 가족관계 서류, 사진 등의 자료를 첨부해서 냈다.
며칠 뒤 궁금증이 생겨 진실화해위에 전화를 걸었다. “아산에서 몇 명이나 접수했나요?” 직원이 말했다. “선생님 말고는 아직 없어요.” 한국전쟁 기간 충남 아산에서만 얼마나 죽었는가. 나중에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보고서가 나왔을 때 희생자를 800여명으로 추산했다. 모든 지역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결과였다. 누군가는 1000명 이상 죽었다고 했다. 어림없는 소리다. 3000명 가까이 죽었다며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는 이도 있다. 아산에서만 그렇게 많이 죽었다. 그런데 나처럼 애를 끓이며 이런 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던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말인가. 주어진 접수 기간은 1년이었다. 그러나 2006년 11월 말까지 최종 접수한 사람은 11명에 불과했다.
장호의 아버지 기성의 모습.
“성명 : 김기성, 생년월일 : 서기 1913년 11월10일, 본적 : 충남 아산 탕정면 동산리 305.”
신청서에 쓴 나의 아버지 인적사항이다. 아버지는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1950년 9월28일 이후인 10월7일 경찰 지서에 연행됐다. 탕정면 용두리에 있는 면 지도자급 회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음날 삼촌 기홍(17)이 지서로 면회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고 했다. 다음날인 10월9일 삼촌은 할머니가 챙겨준 내의를 들고 지서에 찾아갔으나 면회를 거절당했다. 삼촌은 약 300미터 거리 사돈댁에서 그날 밤을 지내다가 자정을 전후해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서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뒷산에 끌려가 총살당한 뒤 그곳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우리집은 8대조, 9대조가 조선시대 관직에 있던 사대부 집안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1년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1950년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우리집은 추방명령을 받았다. 양반 사대부 출신이라는 이유였다. 아버지는 처가인 천안으로 홀로 떠나있어야 했다. 수복 뒤에야 집에 돌아왔는데 부역혐의자로 모함과 밀고를 당했다. 동네 이웃 이씨의 모함이었음은 10년 지나서 알았다.
어처구니없는 시절이었다. 나는 그해 탕정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3반에 다녔다. 음악과 미술을 가르쳐준 김 선생님, 안 선생님도 아버지처럼 끌려간 뒤 사라졌다. 스무살을 갓 넘은 앳된 여선생님들이었다. 김 선생님은 조용했고, 안 선생님은 장난기가 많았다. 내가 반바지를 입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으면 안 선생님은 회초리로 치는 시늉을 하면서 “이놈아 떨어져, 떨어져”라고 말하던 흐릿한 기억이 있다. 노래를 잘 부르면 1교시 끝나고 집에 보내주곤 했다.
전쟁 때 피난을 가지 않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두 선생님은 동네 곡물창고에 갇혔다. 나를 비롯한 꼬마들에게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으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가를 가르쳐주었고, 크레파스로 인공기 그리는 법을 알려줬다. 인민군 점령 시절이었다. 부역이라면 부역이었다. 곡물창고에 갇혀 있던 여선생님들은 죽기 전 면사무소 숙직방에 차례로 끌려가 몹쓸짓을 당했다. 잘못을 했다면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렇다고 절차 없이 성폭행하고 죽여도 될까. 나는 그 짓을 한 두 놈의 이름을 알고 있다.
부역혐의자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이 그렇듯 온가족이 집에서 쫓겨났다. 가까이 지내던 이웃들이 마차로 세간살이를 날라주었다.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엄마는 이미 그해 4월에 맹장이 터져 세상을 떠났다. 둘째 삼촌 집에 얹혀살며 천안의 미인가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1961년 서울에 올라왔다. 군대를 다녀온 뒤 제약회사에 취직하면서 겨우 자리를 잡았다.
나는 끝까지 아버지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만 찾지는 않았다. 2011년 내가 나서 아산유족회를 만들고 회장을 맡은 처지에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꼈다. 2005~2006년 그렇게 적은 인원이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접수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나도 군대와 제약회사를 다니던 시절 경찰 신원조회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걸 눈치챘다. 언제 또 세상이 바뀌어 연좌제 같은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유족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일을 비롯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국민학교 때의 김 선생님 동생을 만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분은 2기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안 선생님의 가족도 찾아내 명예회복을 시켜드리고 싶다.
2019년 5월엔 정말 아버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내 심장이 술렁였다. 아버지가 끌려갔던 탕정면의 지서 뒷산, 그러니까 아산시 탕정면 용두1리(현 염치읍 백암리 49-2)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이곳에 왔다.
아산에서 두 번째 발굴이었다. 그보다 1년 전인 2018년 2월20일부터 3월26일까지 배방읍 중리 산86-1(현 수철리 산174-1) 설화산 지역에서 208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아산시의 지원으로 가능했던 발굴이었다. 그 지원이 결정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2017년 3월의 어느날이었다. 나는 아산시청 로비에서 출근하는 아산시장 기왕을 붙잡고 예산책정을 읍소했다. 당시 아산시장 기왕은 고맙게도 “모든 방법을 강구해 유족들을 도우라”고 아래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맘 깊은 곳에는 탕정면에 묻힌 아버지부터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유족회 회장으로서 엄정해야 했다. 설화산 발굴 현장에는 유족 몇명과 함께 거의 매일 갔다. 작업 이틀째부터 유해와 유품이 쏟아졌다. 탕정면에서도 모든 일이 순조롭지 않을까.
2019년 5월10일 열린 충남 아산시 탕정면 용두1리(현 염치읍 백암리 49-2) 유해발굴 개토제에서 장호는 제단에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놓지 않았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2019년 5월9일부터 21일까지 충남 아산시 탕정면 용두1리(현 염치읍 백암리 49-2)의 산 7부 능선의 70여m 길이, 1.5m 폭 정도의 교통호 전체를 뒤졌다. 발굴 현장에 유족이 바친 꽃다발이 놓여있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탕정 지서 뒷산에서 사람들이 처형당한 직후 어떤 이들은 밤에 몰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청년단원들에게 논 닷 마지기 값을 들이며 시신을 찾았다고 했다. 그때 왜 우리집의 남은 가족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밤에 시신을 수습해오지 않았을까. 어린이였던 나는 모른다. 청년단원들에게 찔러줄 돈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늦게나마 수습할 지도 모른다. 69년 만이다. 진실규명신청서를 53년 만에 접수하고, 또 그로부터 16년 만에 아버지의 뼛조각을 찾는 현장을 내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2019년 5월9일부터 발굴이 시작됐다. 5월10일 열린 개토제 현장에서 나는 제단에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난관을 헤치고 아버지가 있는 여기까지 포클레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 이제 내 손을 잡아주세요.’ 발굴단은 산 7부 능선의 70여m 길이, 1.5m 폭 정도의 교통호 전체를 뒤졌다. 유해의 흔적은 없었다. 대신 교통호를 따라 중국식 무덤의 잔해들이 나왔다. 이곳은 1960년대 예비군 훈련장이었고, 1970년대엔 중국 화교들에게 불하되어 화교 공동묘지로 쓰였다고 했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작업은 5월29일까지 21일간 계속됐다. 발굴단은 산 비탈 전체에서 길이 10m, 폭 1.5m의 표토층 12곳을 파헤치며 단 하나의 뼈라도 찾아보려고 했다. 발굴작업은 5월29일까지 21일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