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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왕릉에 ‘맨발’ 단체 방문까지…걷기 열풍과 예법의 충돌

등록 2023-09-21 09:44수정 2023-10-18 15:18

문화재청, 조선 왕릉 전 지역서 맨발 보행 금지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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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있는 왕릉 흙길은 맨발 걷기의 최적의 장소인데 이젠 맨발로 걸으면 출입 제한을 한다고 하네요. 너무 아쉬워요.”

지난 3월 네이버 카페 ‘맨발 걷기 국민운동본부’에 올라온 글이다. 2만5000여명의 회원이 가입한 이 카페에는 최근까지도 조선왕릉 ‘맨발 보행 금지’ 조처에 항의하는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맨발 걷기 열풍이 불면서 빚어지는 풍경이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왕릉 관리 차원에서 맨발 걷기 제한 조처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맨발 보행 금지한 이유는

21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의 설명을 종합하면, 3월부터 조선왕릉 전 지역에서 맨발 보행이 금지됐다. 기존 ‘자제 요청’에서 한층 규제가 강화됐다.

전국적으로 맨발 걷기 열풍이 불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투어 도심 공원이나 산책로에 황톳길 등을 조성하고 있지만 수백년간 잘 관리된 왕릉이야말로 맨발 걷기의 ‘성지’라고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이날 한겨레에 “왕릉에서 맨발로 걷는 관람객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고 맨발로 걷는 단체 관람객들까지 오기 시작했다”며 ‘왕릉 관리 차원에서 취해진 조처’라고 밝혔다.

현재 왕릉 입구마다 설치된 안내판을 보면 “조선왕릉은 현재도 후손들이 제향과 참배를 지내는 경건한 공간이며 산책로를 포함한 경내 전 지역은 조선시대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조성된 공간으로 맨발 보행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조선왕릉은 효를 중시하는 유교와 당대 최고의 예술과 기술을 집약하며 조영된 문화유산으로, 그 탁월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많은 내외국인이 방문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이해와 협조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현재 조선왕릉을 관람할 때 지켜야 할 ‘궁·능 관람 등에 관한 규정’을 보면, 맨발 걷기뿐 아니라 인화물질 및 무기류, 주류, 야영 용품 및 취사도구 등을 가져오거나 반려동물과 동행하는 경우에도 입장 제한이나 관람 중지 등의 조처를 취할 수 있다.

궁·능 관람 등에 관한 규정

제6조(입장제한 및 관람중지 등) ① 궁능유적기관의 장은 문화재 보존․관리 등을 위하여 다음 각 호 중 어느 하나의 해당하는 자에 대하여 입장제한, 관련 물품 보관 또는 관람 중지 등의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중략)

5. 음주, 복장, 무속 행위, 방언(放言), 사사로운 제사 행위, 종교집회, 고성방가, 풍기문란 및 기타 부적절한 행위로 다른 사람의 관람 또는 문화재 보존․관리에게 지장을 줄 우려가 있는 자

(중략)

서울 노원구 태릉에 설치되어 있는 ‘맨발 보행 금지’ 안내판. 네이버 카페 ‘맨발 걷기 국민운동본부’ 갈무리
서울 노원구 태릉에 설치되어 있는 ‘맨발 보행 금지’ 안내판. 네이버 카페 ‘맨발 걷기 국민운동본부’ 갈무리

‘맨발 시민’이 아쉬워 하는 까닭

안내판이 설치된 지 반년가량 지났지만 이른바 ‘맨발 시민들’은 여전히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19일 ‘맨발 걷기 국민운동본부’의 한 회원은 카페에 글을 올려 “조선왕릉은 시민들의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한 경우가 많고 잘 보존되어 있다. 맨발 시민들에게는 이용하고 싶은 욕구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남겼다.

문화재청 쪽은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유·무형적 가치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2009년 조선왕조(1392~1910)의 1~27대 왕과 왕후, 사후 추존된 왕, 왕후의 무덤 40기(북한 개성지역 2기 제외)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당시 유네스코는 등재 근거로 △풍수지리사상과 엄격한 질서, 주변 산세와 어우러진 신성 공간의 창출 △봉분과 조각, 건축물들의 전체적 조화 등을 들면서 “동아시아 전통 묘제의 중요한 발전 단계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600년 이상 제례의식을 거행하면서 살아 있는 전통을 간직해왔다”는 점도 주요 근거로 언급했다. 실제로 191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왕릉의 제례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여건이었는데,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이를 이어받아 지금껏 해마다 제례를 거행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가운데 유일하게 미공개 상태로 남아있다가 8일부터 개방된 조선 제12대 왕 인종과 인성왕후의 무덤 효릉의 모습. 연합뉴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가운데 유일하게 미공개 상태로 남아있다가 8일부터 개방된 조선 제12대 왕 인종과 인성왕후의 무덤 효릉의 모습. 연합뉴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지금껏 제례와 같은 전통적 기능을 유지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맨발은 전통적 기능에 걸맞은 전통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라며 “거꾸로 왜 왕릉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냐는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다”고 밝혔다.

제례를 지내는 제향공간이나 봉분이 있는 능침공간이 아닌 산책로에서만큼은 맨발 걷기를 허용해달라는 목소리에는 “조선왕릉은 전 구역이 사적지이기 때문에 산책로만 별도로 규제를 풀 수는 없다”고 답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왕릉의 능역은 능침공간 등 핵심공간과 마찬가지로 모두 죽은 자를 배려해 관리됐는데, 능역의 대부분은 자연산림공간으로 능침공간을 중심으로 겹겹이 에워싸 완충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밖에 숲이 우거진 왕릉의 특성상 뱀과 같은 야생 동물에게 맨발이 물리는 등 안전사고 우려도 고려했다고 한다.

맨발과 예법 사이 갑론을박

하지만 ‘맨발이 예법에 어긋나냐’를 두고는 다른 목소리도 나온다. 박동창 ‘맨발 걷기 국민운동본부’ 회장은 지난 3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중부지구관리사무소장에 보낸 문서에서 “왕이나 왕비가 계시는 곳에서는 누구든 더러운 신발을 벗고, 깨끗한 버선발이나 맨발로 왕이나 왕비를 경배해야 우리 전래의 오랜 예의 법도에도 맞는다”고 주장했다.

‘맨발 시민’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19일 ‘맨발 걷기 국민운동본부’ 카페에 올라온 또 다른 회원의 글을 보면 “맨발로 다닌다고 왕릉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장례식장에서도 맨발로 들어가기에는 뭔가 조심스럽지 않나. 왕릉이 일반 공원이 아닌 만큼 신발을 신었으면 한다”고 썼다. 이 글에는 “굳이 욕을 먹어가며 왕릉을 맨발로 걸으면 힐링이 되겠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맨발 걷기는 피하자”는 의견이 댓글로 달렸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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