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설립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연좌제 피해를 입은 한국전쟁기 학살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새로운 연좌제를 적용하고 있다. 지난 7월18일 오후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6층 진실화해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59차 전체위원회에서 김광동 위원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중학교 나오고 좀 괜찮은 직장에 취직하려고 하면 신원조회에 걸려서 못한 일이 수없이 많았다. 결국 포기하고 농사만 짓고 살았다.”(정연철)
“대구 공군부대(K2)의 문관으로 들어가려다가 신원조회에 걸려 들어가지 못했다.”(권병식)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를 합격하였는데 신원조회에 걸려서 불합격되었다.”(안병쾌)
“군대에 갈 때 보안대로 가려고 했는데 신원조회에 걸려서 가지 못했다. 형도 공무원으로 취직하려다 포기했다. 어머니께서 우리 집안사람은 아예 공무원은 할 수 없다고 했다.”(이종성·이무남 등)
피해 사례는 끝이 없다.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던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희생자 유족들의 연좌제 피해사례다. 이 내용은 2009년 9월 이 사건을 진실규명했던 1기 진실화해위 보고서에 담겨있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영천 사건과 관련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경북 영천지역의 보도연맹원·예비검속자 600여 명이 국민보도연맹원 또는 전선 접경지역 거주민으로 인민군에게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군경에게 살해된 사건”이라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23년 10월의 2기 진실화해위에서는 똑같은 영천 사건과 관련해 때아닌 ‘부역자 논란’을 벌이고 있다. 1기때는 신청인들의 연좌제 피해사례까지 꼼꼼히 담아 진실규명을 내렸던 진실화해위가 2기 때는 직접 연좌제를 부활시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신청인들에게 불이익을 주려는 모양새다.
9살 꼬마에까지 ‘살인·방화범’이라고 적은 영천경찰서 사찰자료의 기록이 그 근거가 되고 있다.
“사촌동생이 원양어선을 타려고 하다가 연좌제에 걸려서 못 간 적 있다. 형부가 취업문제로 외국에 가려고 했는데 장인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못 나갔다고 했다.”(윤점도)
“공무원 시험을 치려고 했는데 법무부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아 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친척 중 법무부에 재직하시던 분이 ‘너는 응시해도 안 된다’라고 하셨다.”(황보진호)
“1970년대에 큰아들이 학사장교로 군 입대하려고 했는데 신원조회에 걸려서 가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십 년 전에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은 동생 때문이었다.”(김위갑)
영천 사건의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연행되어 영천경찰서 및 각 지서에 구금됐다가 1950년 7월 초순부터 9월 중순 사이에 임고면 아작골(절골), 자양면 벌바위, 대창면 용전리(어방리) 개망골, 고경면 내 골짜기, 북안면 내 골짜기 등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숫자는 2009년 당시 조사과정에서 신원이 밝혀진 219명을 포함하여 600여 명으로 추산됐다.
희생자들은 △1946년 10월사건 관련자, 남로당 가입자, 입산자 중 자수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 △이들에게 연루되었던 일가친척 △산간지역과 전선 접경지역 주민 등 비무장 민간인들이었다. 90%가 농업 종사자였으며 연령별로는 20~30대가 74%를 차지했다. 10대 이하 미성년자는 약 5%로 이중 10살 이하 아동이 2명이었다. 성별로는 남성이 대다수였고 여성 중에는 임산부가 포함돼 있었다.
1기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를 보면, 희생자들은 1950년 7월 초순부터 1차로 살해됐다.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던 1950년 8월7일에서 11일 사이에 임고면과 자양면 등 영천 북부의 전선 접경지역에서 380여 명이 2차로 살해되었다. 또한 영천·신녕전투가 벌어지던 9월4일에서 10일 사이에 후방인 영천 남부의 고경면, 대창면, 북안면 등에서 영천경찰서에 장기 구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과 일부 피난민 등 170여 명이 3차로 살해되었다.
1기 진실화해위 보고서는 “당시 영천은 한국전쟁의 최전방이었기 때문에 군경 측은 인민군이 들어올 경우 주민들이 여기에 호응할지도 모른다고 미리 우려하여 보도연맹원들과 일부 전선 접경지역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적었다.
“조카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육사로 진학했다. 육사에 합격하여 입소한 며칠 뒤 연좌제에 걸려 나왔다. 그 뒤 일반 국립대학교로 진학해 졸업하여 대기업에 입사했으나 진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이종영)
“친척 중 교편 잡으려고 하다가 연좌제 때문에 포기한 사람이 두 사람 있다.”(안병완·안수환)
“우리 마을 황보씨들은 학교 급사를 하려고 해도 신원조회에 걸리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일족 중에는 면서기도 순경도 한 사람 없다. 나중에 연좌제가 폐지되었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인재를 키우지 못했으니 유족들이 그 많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하고 나 설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황보문)
연좌제는 한국전쟁과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유물이다. “인민군이 들어올 경우 인민군에게 호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만으로 600여명의 주민들을 살해했고, 살해한 자들이 아니라 살해당한 자들이 대역죄인이 되었다.
‘죄인’의 가족들은 온갖 제약을 받았다.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도, 경찰이 될 수도, 법조인이 될 수도, 교사가 될 수도, 원양어선을 타고 외국에 나갈 수도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연좌제 사례를 넣으며 2009년에 이 보고서를 작성했던 진실화해위 조사관은 14년 뒤에 희생자들이 당할 공격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기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을 받은 영천 사건의 신청인은 31명이다. 조사 과정에서 추산된 600여 명의 희생자 숫자를 감안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2기 때도 영천 사건 진실규명 접수는 계속됐다. 5개월 넘게 보류된 최근의 영천 사건 조사보고서엔 20여명의 희생 건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0일 진실화해위에서는 이 사건의 전체위원회 상정 여부를 놓고 재심의를 한다.
9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영천유족회(회장 김만덕)는 호소문을 내고 “(1950년 7~9월 보도연맹 학살 이후) 30년이 지난 1979~81년에 당시 가해자 경찰이 학살을 정당화 책임회피하기 위한 사찰 기록을 허위로 기재하여 (이에 따라 부역자를 판단하는 것은) 피해자를 두번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사건이다. 이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기 진실화해위의
영천 보고서는 진실화해위 누리집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