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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실형 선고한 학생들엔 지금도 미안”

등록 2007-02-04 19:29수정 2007-02-04 19:43

이영구 변호사.
이영구 변호사.
‘긴급조치 무죄판결’ 이영구 전 판사 인터뷰
“법관은 판결문으로 말하는 거지. 나중에 말을 덧붙이면 애초 판결이 미화되거나 왜곡될 수 있어요.”

서울대생 시위 ‘5·22 사건’ 두명에만 실형
약오른 청와대, 대법원장에 인사조처 압력
“유죄판결 판사들도 낮은형 주려 애썼다”

1976년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이영구(75·당시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형사부장판사) 변호사는 몇 차례 고사 끝에 지난 3일 서울 동작구 흑석동 집에서 인터뷰를 허락했다.

이 변호사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유죄를 선고했던 많은 법관들을 변호하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는 “유신시대에 사법부가 정권에 맹종한 것은 아니었다”며 “나처럼 무죄판결을 내린 판사도 있었고,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최대한 낮은 형을 내리려고 애쓴 판사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긴급조치가 죄형법정주의에 반하는 법이었고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당연한 저항을 억지로 누르려는 조치였다는 데는 모든 판사들이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며 “법관들이 판결문에 그냥 도장을 찍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 스스로도 유죄 판결을 내린 적이 있다. 주로 민사부장판사를 맡던 그가 처음으로 시국사건과 맞닥뜨리게 된 건 1975년 영등포지원 형사부장을 맡으면서였는데, 이곳은 서울대와 가깝기 때문에 시위를 하다 붙잡힌 서울대생들의 재판이 많은 곳이었다. 1976년 여름 서울대생 네명이 이 변호사의 재판정에 섰다. 독재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대생 김상진씨의 49재에 맞춰 서울대생들이 교내 시위를 벌인 ‘5·22 사건’의 주역들이었다. 이 변호사는 네명 가운데 두명에게 징역·자격정지 1년6개월을 선고했고, 나머지 두명은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이 변호사는 “지금도 그때 실형을 선고한 학생들에게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판결은 당시 정권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관대한 판결이었다. 이때부터 이 변호사의 좌천은 예고된 것이었다. 이 변호사는 “그때 서울대 학생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주자마자 정부에서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에게 나를 인사조처하라는 압력을 넣었다고 나중에 전해들었다”며 “사법권 독립을 지키려는 민 대법원장이 1976년 말 정기인사 때까지 나에 대한 인사를 계속 미뤄줬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이미 위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대법원장이 힘들게 그 압력을 막아내고 있는 상황인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여고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며 “청와대에서는 약이 올랐을 테고, 대법원장도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결국 1977년 1월 전주지법으로 발령이 났고, 한달여 뒤 법복을 벗었다. 가까운 동료 판사들과 그의 부인은 변호사 개업을 하려는 그를 말렸다. 거짓말할 줄 모르고, 돈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이 개업을 했다가는 밥 굶기 십상이라는 이유였다.

법복을 벗은 뒤 이 변호사에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사람들이 찾아왔다. 시국사건 변론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변호사는 정중히 거절했다. 이 변호사는 “변호사 개업해 시국사건을 맡으면 남들이 생각하기에 ‘원래 운동권과 가까운 사람이라서 법관 시절에 그렇게 판결했구나’라고 오해할 것 같아서 거절했다”며 “개업해서 내가 정치적 색채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서 재판을 하고 있는 법관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개업 2년 뒤 동아그룹 상임법률고문을 맡아 1997년까지 그의 바람대로 ‘조용하고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 변호사는 “일흔이 넘어서도 사무실을 유지하고 일할 수 있는 직업이 또 어디 있겠느냐”며 “그런 만큼 모든 법관들이 시세를 의식하지 말고 올바른 법을 잘 적용해 법 이상을 실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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