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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바둑판 한마디 ‘모택동주의자’ 내몰려

등록 2007-02-09 16:45

1974년 10월 유신체제에 맞서 언론자유를 쟁취하자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한 뒤 해직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의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들이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로부터 종로5가 기독교회관까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청우회 사건’은 동아투위 소속 기자 등 젊은 언론인들을 반체제 인사로 몰아가려는 시도였다. 작은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에서 각사 단위로 모인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는 장면. 동아투위 제공, 보도사진연감
1974년 10월 유신체제에 맞서 언론자유를 쟁취하자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한 뒤 해직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의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들이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로부터 종로5가 기독교회관까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청우회 사건’은 동아투위 소속 기자 등 젊은 언론인들을 반체제 인사로 몰아가려는 시도였다. 작은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에서 각사 단위로 모인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는 장면. 동아투위 제공, 보도사진연감
[긴급조치 사건의 재구성] (중) 청우회 사건
성유보·이부영씨등 언론인 ‘시대적 고민 나누자’ 모임 결성 옥살이까지
1975년 6월25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앞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침묵시위가 열렸다. 석달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린 시위였다. 동아투위는 74년 10월 유신체제에 맞서 언론자유를 쟁취하자는 내용의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가 이듬해 3월 강제 해고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130여명의 모임이다.

“상대방 중앙 탄탄하면 주변 옭아매 들어가야”
동아투위 사무실서 바둑 두다 무심코 던진 말
교양서적 몇권과 함께 ‘사상범’ 증거물로 둔갑

시위를 마치고 해산하려던 성유보(당시 33세·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씨를 검정색 양복을 입은 사내 2명이 가로막았다. 신분증을 보지 않아도 중앙정보부 요원의 ‘냄새’가 풀풀 났다. “볼 일이 있으니까 같이 갑시다.” 성씨는 속으로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동아투위 대변인을 맡고 있던 동료 이부영(전 국회의원)씨가 보름 전 갑자기 행방불명된 터였다. 그동안 이씨의 소재를 수소문해 온 성씨는 이들을 만나는 순간 이씨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성씨는 요원들에 이끌려 검정색 승용차에 올랐다. 차는 남산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나와 이부영을 같이 엮을 것이 뭐가 있나?’ 생각하던 성씨는 이윽고 ‘청우회’에 생각이 미쳤다.

74년 초 성씨는 동아방송 프로듀서를 그만둔 이창홍씨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동아일보 근처 중국음식점 ‘복치루’에서 이부영씨와 함께 만났다. 자연스럽게 독재정권 치하에서 언론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대다수의 젊은 언론인들이 독재정권에 대해 할 말을 못 하는 처지에 자괴감을 느끼던 때였다. 대학생들을 취재할 때면 욕설을 듣고 돌팔매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창홍씨는 이 자리에서 시대적인 고민을 나눌 언론인들의 모임을 제안했다. 갑작스러웠지만 성씨와 이부영씨는 그 뜻에 동의해 선뜻 승낙했다. 이후 같은 대학 동기인 정정봉(66)씨가 합류했다. 이들 4명은 앞으로 마음이 맞는 사람을 더 모으기로 하고, 모임에 ‘청우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부영씨가 회장을 맡았다. 이들은 그해 서너 차례 모였지만, 동아투위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만남이 끊겼다.

1970년대 유신 치하에서 언론자유를 주장하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성유보 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은 당시 몇몇 동료들과 만나 시대를 고민한 게 공산주의 모임 결성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1970년대 유신 치하에서 언론자유를 주장하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성유보 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은 당시 몇몇 동료들과 만나 시대를 고민한 게 공산주의 모임 결성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남산 중앙정보부 조사실에 들어가보니 성씨의 예감이 적중했다. 역시 ‘청우회’가 문제였다. 조사관은 “너희 수괴가 다 불었다”며 “너희 같은 놈들 휴전선에 떨궈 놓으면 누구라도 월북한 것으로 안다”고 협박했다. 만남 자체를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성씨는 서너 차례 만나 언론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한 사실을 인정했다. 조사관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성씨를 공산주의자로 몰려는 조사관들이 3권의 책을 내놓았다. 김상엽 전 고려대 총장이 쓴 <모택동 사상>과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시절 읽은 <사회사상사>, 이종남 당시 민주당 의원이 쓴 <민주사회정의론>이었다. 어느새 그의 집을 압수수색해 가져온 책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들로 성씨를 공산주의자로 몰기에는 부족했던가 보다. “이미 불려와 조사를 받은 동아투위 동료가 불었다”며 조사관이 물었다.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바둑 두다가 ‘상대방 중앙에 집이 탄탄하면 곧장 쳐들어가면 안 된다. 주변부터 옭아매 들어가야 한다. 이게 모택동 식이다’라고 말했다며?” 성씨는 어이가 없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바둑판에서 상대방의 중앙 대마를 잡기 위해 변죽을 울리며 건넨 한 마디가 성씨를 모택동주의에 기운 사상범으로 만든 ‘증거’가 된 것이다.

성씨는 남산에서 20여일 동안 조사를 받고 서울구치소로 옮겨졌다. 그해 12월29일 열린 재판에서 검찰이 구형을 했다. 이부영씨와 성씨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징역 8년을 구형한 40대 초반의 검사가 진지하게 구형 이유를 읽어내려갔다. “이들은 기자 신분으로 사회에 기여를 할 수 있는 동량임에도…”로 시작해 “이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높은 형량을 구형한다”로 끝났다. 검사가 고사까지 인용해가며 기소를 정당화하자 성씨도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검사를 향해 외쳤다. “우리가 마속이면 당신이 제갈량인가? 이런 사건으로 제갈량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까마득한 과거에 군법으로 처리했던 일과 지금 우리 민주주의 법정이 비교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검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이 벌개졌다. 판사가 제지에도 불구하고, 동아투위 회원 20여명이 앉아있는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판사도, 검사도 성씨의 말을 논리로써 받아치지 못했지만, 칼자루는 엄연히 그들이 쥐고 있었다. 이틀 뒤 이씨는 징역 8년을, 성씨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는 형량을 유지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느낀 재판부가 반공법 위반 혐의를 빼고 이씨에게 징역 2년6개월, 성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결국 서너 차례 동료들과 모여 시대를 고민한 젊은 언론인들은 책장에 꽂혀있던 몇 권의 교양 서적과 바둑판 앞에서 내뱉은 한 마디로 ‘모택동주의자’가 되어 ‘읍참마속’을 당해 1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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