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숙 전 교수를 구속하는 근거가 됐던 긴급조치 9호의 선포를 알리는 1975년 5월14일치 <조선일보> 1면. 헌법 비판이나 학생의 정치 관여 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내용을 보도하면 언론을 폐간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긴급조치 사건의 재구성] ①송기숙 교수의 교육지표 사건
50여명 서명 추진중 외신 공개돼 전남대 교수 11명 중앙정보부 연행
상식이 불법이 되고 술자리 대화까지 처벌받던 암울한 1970년대의 실상이 당시 긴급조치 위반 사건의 판결 공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한겨레>는 몇가지 사건의 수사·재판 과정을 좇아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진실을 찾고 기록하려 한다.
“성명서에는 규탄이니 뭐니 하는 거친 말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서명했던 교수 11명이 그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습니다.”
1978년 6월27일 송기숙(72) 당시 전남대 국문과 교수를 비롯해 같은 대학 교수 11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사실왜곡 표현물 제작·배포) 혐의로 무더기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 지하실로 연행됐다.
교수들이 외신에 배포한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서 가운데 “국민교육헌장이 교육 실패의 본보기이고, 행정부가 이를 독단적으로 추진한 것은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일제 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는 부분이 문제가 됐던 것이다. 또 △학원의 민주화·인간화 △민주주의에 대한 정열 △외부 간섭의 배제 △자주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교육 등 지금 관점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들도 당시의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아래선 ‘사실 왜곡’과 ‘정권 비방’으로 둔갑했다.
이 사건으로 송 교수는 구속됐고, 다른 교수들도 학교를 ‘자퇴’해야만 했다.
‘학생시위 감시꾼 전락’ 모멸감에 교수들 뜻모아
검사 엉터리 논고에 방청객 야유 재판장은 진땀
송 교수 ‘4년형’ 1년 뒤 특별사면…10명은 ‘자퇴’
‘침묵의 벽’을 뚫다=1978년 초여름, 광주 용봉동 전남대 인문대학 등나무 아래에는 늘 신임교수 여러 명이 눈을 밝히고 서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학생 시위를 막는 것. 연구실로 돌아오면 다른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을 ‘지도’한 결과를 담아 보고서를 써야 했다. 문제를 일으킬 학생들을 따로 만나 술을 사며 ‘회유’하는 것은 퇴근 후 일과였다. 서울 이화여대에서는 이런 일을 맡았던 일부 교수들이 학생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기까지 했다.
송 교수는 이런 모멸감을 견딜 수 없어, 뜻을 같이하는 교수들과 은밀히 ‘성명서’ 한 장을 만들었다. ‘우리의 교육지표’가 그 제목이었다. 원고는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건으로 대학에서 쫓겨나 창작과비평사로 출근하던 백낙청 전 서울대 교수가 썼다. ‘연락책’이던 성내운 전 연세대 교수(89년 작고)가 6월 들어 사전에 비밀이 새나갈 것을 걱정해 일본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과 <에이피통신>에 성명서를 보내면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송 교수는 크게 화를 냈지만, 성 교수는 “송 교수, 당신을 제 2의 최종길 교수처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라며 그를 달랬다.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최종길 전 서울대 법대 교수 사건은 이미 악명이 높았다. 중앙정보부 조사실=서명에 참여한 서울 쪽 교수 40여명을 보호하기 위해 송 교수를 포함한 전남대 교수 11명이 모든 책임을 떠안기로 말을 맞췄다. 불안한 발걸음으로 6월27일 아침 학교 연구실로 가자 이미 두 사람이 송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수갑조차 채우지 않았다. 이상했다. 중정 전남지부 대회의실에서 지부장과 부지부장, 수사계장이 송 교수를 둘러싸고 심문을 벌였다. 하지만 300촉 백열전구 아래서 긴장한 쪽은 송 교수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교수들 연행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그들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수사계장이 송 교수를 4평짜리 지하 조사실로 데려갔다. 서명에 참여한 교수들 명단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수사계장은 일제 때 수사관으로 이름을 날렸던 베테랑 조사관이었다. 닷새쯤 지난 어느날 2㎝ 두께의 서류뭉치를 들고 내려온 그는, “이제 우리 실랑이 한번 쳐봅시다”라며 자리에 앉았다. 송 교수는 올 것이 왔다 싶었다. 그때 지하계단 위에서 심부름하던 아이가 후다닥 내려오더니 “얼른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 우연히 내려다본 서류 맨앞장에는 ‘1. 가톨릭농민회와의 관계’라는 글자가 보였다. 순간 직감이 스쳤다. ‘이놈들이 나를 반공법 위반으로 엮으려는구나.’ 하지만 한참 뒤에 내려온 조사관은 그냥 서류를 들고 다시 올라가버렸다. ‘간첩 아닌 간첩’이 될 뻔한 위기를 벗어난 순간이었다. 송 교수는 등골에서 땀이 주르륵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긴조 검사’의 굴욕=송 교수는 같은해 7월4일 구속기소된 뒤 한 차례 공판을 거쳐, 8월23일 광주지법 대법정에 섰다. 결심 공판이었다. 당시 주임검사였던 김아무개 검사는 논고를 진지하게 읽어나갔다. “마치 국민교육헌장이 제정·선포 과정에서 행정부 독단으로 추진하고 내용에 비민주적인 요소가 있는 양 사실을 왜곡하는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배포하는 등….” 웃기는 말이었다. 검찰은 송 교수가 ‘국민교육헌장에 국가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비판했다는 이유로 기소해놓고는, 전남 교육위 장학관까지 증인으로 불러 ‘국가주의는 좋은 것’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검찰 쪽 논리가 엉터리였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방청석에서 “우~” “에이” 하는 비야냥거림이 터져나왔다. 법정을 가득 채운 방청객 70여명이 이구동성으로 낸 소리였다. 당황한 김 검사는 방청객들을 노려보며 “이런 재판만 찾아다니며 재판정의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들이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방청석에는 고은, 이호철, 이문구 등 시인·작가와 함석헌, 백낙청, 문동환, 이부영 등이 자리잡고 있어, 우리나라 대표 지식인을 모두 그러모은 듯했다. 때문에 재판장은 연방 땀을 닦기에 바빴고, 검사의 볼멘소리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송 교수는 최후진술을 이렇게 끝맺었다. “재판부에 대해 구태여 나를 풀어달라고 요구하지 않겠다. 오직 진실을 위하여 판결해줄 것만은 당부하겠다.” 닷새 뒤 열린 선고공판에서 송 교수에게 징역 4년·자격정지 4년을 선고한 문영택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은 그뒤 모두 승승장구했다. 송 교수는 1년여 동안 옥살이를 한 끝에 다음해 제헌절 특별사면으로 교도소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검사 엉터리 논고에 방청객 야유 재판장은 진땀
송 교수 ‘4년형’ 1년 뒤 특별사면…10명은 ‘자퇴’
송기숙 전 전남대 교수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뒤 1980년 광주항쟁 때도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복직했다 2000년 은퇴했다.
송 교수는 이런 모멸감을 견딜 수 없어, 뜻을 같이하는 교수들과 은밀히 ‘성명서’ 한 장을 만들었다. ‘우리의 교육지표’가 그 제목이었다. 원고는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건으로 대학에서 쫓겨나 창작과비평사로 출근하던 백낙청 전 서울대 교수가 썼다. ‘연락책’이던 성내운 전 연세대 교수(89년 작고)가 6월 들어 사전에 비밀이 새나갈 것을 걱정해 일본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과 <에이피통신>에 성명서를 보내면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송 교수는 크게 화를 냈지만, 성 교수는 “송 교수, 당신을 제 2의 최종길 교수처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라며 그를 달랬다.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최종길 전 서울대 법대 교수 사건은 이미 악명이 높았다. 중앙정보부 조사실=서명에 참여한 서울 쪽 교수 40여명을 보호하기 위해 송 교수를 포함한 전남대 교수 11명이 모든 책임을 떠안기로 말을 맞췄다. 불안한 발걸음으로 6월27일 아침 학교 연구실로 가자 이미 두 사람이 송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수갑조차 채우지 않았다. 이상했다. 중정 전남지부 대회의실에서 지부장과 부지부장, 수사계장이 송 교수를 둘러싸고 심문을 벌였다. 하지만 300촉 백열전구 아래서 긴장한 쪽은 송 교수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교수들 연행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그들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수사계장이 송 교수를 4평짜리 지하 조사실로 데려갔다. 서명에 참여한 교수들 명단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수사계장은 일제 때 수사관으로 이름을 날렸던 베테랑 조사관이었다. 닷새쯤 지난 어느날 2㎝ 두께의 서류뭉치를 들고 내려온 그는, “이제 우리 실랑이 한번 쳐봅시다”라며 자리에 앉았다. 송 교수는 올 것이 왔다 싶었다. 그때 지하계단 위에서 심부름하던 아이가 후다닥 내려오더니 “얼른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 우연히 내려다본 서류 맨앞장에는 ‘1. 가톨릭농민회와의 관계’라는 글자가 보였다. 순간 직감이 스쳤다. ‘이놈들이 나를 반공법 위반으로 엮으려는구나.’ 하지만 한참 뒤에 내려온 조사관은 그냥 서류를 들고 다시 올라가버렸다. ‘간첩 아닌 간첩’이 될 뻔한 위기를 벗어난 순간이었다. 송 교수는 등골에서 땀이 주르륵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긴조 검사’의 굴욕=송 교수는 같은해 7월4일 구속기소된 뒤 한 차례 공판을 거쳐, 8월23일 광주지법 대법정에 섰다. 결심 공판이었다. 당시 주임검사였던 김아무개 검사는 논고를 진지하게 읽어나갔다. “마치 국민교육헌장이 제정·선포 과정에서 행정부 독단으로 추진하고 내용에 비민주적인 요소가 있는 양 사실을 왜곡하는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배포하는 등….” 웃기는 말이었다. 검찰은 송 교수가 ‘국민교육헌장에 국가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비판했다는 이유로 기소해놓고는, 전남 교육위 장학관까지 증인으로 불러 ‘국가주의는 좋은 것’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검찰 쪽 논리가 엉터리였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방청석에서 “우~” “에이” 하는 비야냥거림이 터져나왔다. 법정을 가득 채운 방청객 70여명이 이구동성으로 낸 소리였다. 당황한 김 검사는 방청객들을 노려보며 “이런 재판만 찾아다니며 재판정의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들이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방청석에는 고은, 이호철, 이문구 등 시인·작가와 함석헌, 백낙청, 문동환, 이부영 등이 자리잡고 있어, 우리나라 대표 지식인을 모두 그러모은 듯했다. 때문에 재판장은 연방 땀을 닦기에 바빴고, 검사의 볼멘소리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송 교수는 최후진술을 이렇게 끝맺었다. “재판부에 대해 구태여 나를 풀어달라고 요구하지 않겠다. 오직 진실을 위하여 판결해줄 것만은 당부하겠다.” 닷새 뒤 열린 선고공판에서 송 교수에게 징역 4년·자격정지 4년을 선고한 문영택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은 그뒤 모두 승승장구했다. 송 교수는 1년여 동안 옥살이를 한 끝에 다음해 제헌절 특별사면으로 교도소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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