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감감 ‘정태수 항소심’…왜 질질 끄나

정태수 회장 일지

학교돈 횡령 1심 징역 3년 고령 이유 법정구속은 안해
항소심 5달간 감감무소식 되레 ‘출금 풀어달라’ 소송

학교 돈을 빼돌린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법정구속되지 않은 정태수(84) 전 한보그룹 회장의 항소심 공판이 지난해 11월 이후 5개월 동안 열리지 않고 있다. 이는 4개월 안에 항소심을 끝내도록 한 ‘소송촉진에 관한 특례법’을 어긴 것이다. 그럼에도 정씨는 오히려 출국금지를 풀어달라는 소송을 냈다.

정씨는 지난해 2월 자신의 며느리가 이사장으로 있는 강원도 강릉 영동대학교 학생들의 기숙사 임차보증금 명목 등으로 학교 돈 60억여원을 빼돌린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횡령)가 인정돼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기소된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고령 등을 이유로 정씨를 법정구속하지 않았다.

이후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서기석·지난해 8월까지는 이인재 현 인천지법원장)는 지난 1년 동안 10차례 공판 날짜를 잡았는데, 이 중 5차례나 연기됐다. 특히 지난해 12월로 예정됐던 공판은 올 2월로 연기됐다가, 다음 공판 날짜도 정해지지 않은 채 또다시 미뤄졌다. 이에 대해 서울고법 형사1부는 “지난해 11월 정씨 쪽에서 새로운 변호사가 선임돼 기록을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청해 올 2월로 재판 기일을 넉넉히 잡았는데, 2월에는 사건이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돼 재판 기일을 추정(추후지정)해야 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재판 초기부터 정씨 쪽에서 재판을 천천히 진행해줄 것을 요청해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재판 과정에서 증인이 출석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몇차례 연기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 정씨 사건을 재배당받은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심상철)는 “항소심 구속기한(4개월) 만료가 임박한 다른 구속 사건들부터 빨리 처리해야 되는 어려움이 있다”며 “정씨 재판을 언제 시작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정씨는 29일 법무부를 상대로 외국에서 지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이유로 출국금지 연장 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냈다. 정씨는 서울행정법원에 낸 소장에서 “세금 납부에 관한 사정이 변경되지 않았는데도 종전의 세금 체납을 이유로 출국을 금지한 것은 부당하다”며 “치료 목적을 위한 출국은 생존권적인 기본권 보장과 관련된 것으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지난해까지 증여세 등 국세 2127억원을 체납해 3년 내리 최고액 체납자가 됐다. 정씨는 거액의 세금을 체납하면서도 한달 임대료가 1천만원이 넘는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가회동 자택에 전세로 살고 있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1997년 한보그룹이 부도난 뒤 회삿돈 2천억여원을 횡령한 혐의(특정 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횡령) 등으로 징역 15년, 뇌물공여죄로 징역 10월이 확정돼 복역중이던 정씨는 2002년 12월 특별사면돼 석방됐다.

이순혁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