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환 목사
한겨레가 만난 사람-‘민족통일대회’ 참석차 귀국한 문동환 목사
“아직 90도 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무슨 말이냐!” 2001년 5월 팔순잔치를 금강산에 가서 하겠다고 했을 때 ‘연로하신 몸으로 산에 오를 수 있겠느냐’고 만류하는 자녀들에게 그는 이렇게 호통을 쳤다. 열일곱 때인 1938년 용정의 은진중학교 졸업반 수학여행길에 가 본 이래 휴전선이 막혀 가보지 못했던 금강산이었다. 내금강을 거쳐 비로봉 산정에서 자고 일어나 맞이했던 동해 해돋이의 감격을 60년이 넘도록 잊을 수 없었던 그는 아내에게도 그 장관을 보여주고 싶었다.
‘CEO 대통령’ 자처한다면
퇴행적 대북정책 바꿔야 ‘6·15 공동선언’ 발표 8돌을 기념하는 민족통일대회 참석차 1년 만에 귀국한 문동환(87·사진) 목사는 13일 대회장인 ‘금강산’과 얽힌 일화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2005년 3월 결성된 ‘6·15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에서 재일 곽동의 한국민주통일연합 상임고문과 함께 재미 대표로 해외공동위원장을 맡은 그는 이후 해마다 6월과 8월, 한두 차례 고국을 찾는다. “6·15 공동선언은 인류사의 첫 사건이다. 총을 들고 서로 싸우던 적들끼리 ‘공멸’을 인식해 ‘평화’에 합의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로마제국에서 보듯 승자가 힘으로 지배하는 일방적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상생의 진리, 예수님의 가르침이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빨갱이’라던 김대중 선생이 김정일 위원장과 악수를 했지만 돌 대신 환호를 받았다. 민족적 각성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00년 6·15 선언 당시, 미국 뉴저지주 자택에서 처음 뉴스를 들었을 때의 감동을 떠올린 듯, 그는 “20세기는 세계대전 등으로 비참했지만 21세기는 평화공존의 시대다. 남미에서도 남아프리카에서도 한반도에서도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굉장한 사건이었다”라고 되뇌었다. 89년 3월 분단의 벽을 온몸으로 뚫고 ‘통일의 문’을 열어주고 떠난 세 살 터울의 형, ‘늦봄’ 문익환 목사가 이 순간을 함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새삼 그리웠던 순간이기도 했다. “애초 공동위원장 제안을 받았을 때, 팔순도 훨씬 넘어 ‘노욕’ 부리면 욕만 먹는다는 생각에 주저했다. 민간 차원의 자발적 활동이고 여비도 스스로 부담하는 일이라 잠시나마 힘을 보태기로 했다”는 그는 올해 새 단독 대표에게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랐는데 이명박 정부의 ‘퇴행적 대북정책’으로 애써 키워온 ‘6·15 정신’이 흔들리고 있다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이 대통령이 ‘시이오(CEO) 지도자’를 자처한다면, 남북교류가 우리 중소기업 회생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잃어버린 10년’식 인식은 교류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그나마 여권에서 교류를 지지해 온 세력이 밀리고, 반대파가 득세를 하는 듯해, 발목을 잡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장기적으로 남북관계를 낙관한다. “상대는 ‘우리끼리’ 하자는데 ‘조건’ 내걸면 안 된다. 지난 12일 김하중 통일부 장관의 발언에서 ‘7·14, 6·15, 10·4 합의 정신을 승계하겠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스럽다. 북과 교류의 끈을 놓지 않도록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는 이번 촛불집회에서도 ‘희망의 기운’을 보고 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허용은 참으로 엉뚱한 짓이다. 이 정부가 순전히 미국에 잘 보이려고 한 일이다. 그런데 그 덕분에 우리 국민들이 세계화의 핵심을 간파하게 됐다. 지금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물질주의·권위주의라는 ‘3악’을 본질로 하는 ‘돈주주의’다. 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죽음의 문화’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때까지만 해도 ‘경제 우선’을 요구하며 그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던 국민들을 이 정부가 단번에 자각시켜주고 있다. 박정희 독재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열망을 일깨워줬듯이 말이다.”
세계화 속 떠돌이 민중들
‘촛불’로 대안세상 밝히길 교육가, 민중신학자, 민중운동가, 정치가 … 그는 파란의 근·현대사 속에서 누구보다 다채로운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얘기는 목회자로서 언제나 ‘하나님과 예수의 뜻’으로 모아졌다. “다국적 기업이 지배하는 산업문화 속에서 민중은 떠돌이 신세다. 중국만 해도 2억명이 떠돌이로 전락해 비참한 희생 속에 생존의 투쟁을 하고 있다. 이제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이 로마제국 아래서 떠돌이 유대인들을 이끌어 갈릴리에서 생명문화 운동을 역사했듯이, 최제우 선생 같은 선각자의 한마디면 충분하다. 김지하 선생이 말한 ‘각’도 새길이자 회개를 뜻한다. 시간이 흐르면 대중의 집단적 ‘각’이 이뤄진다. 6·10 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촛불집회도 그 깨달음의 과정이다.” 그가 80년대부터 주창해 온 ‘떠돌이 신학’은 이제 하나의 신학론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얼마 전 자서전 초고를 끝낸 그는 현재 <떠돌이 신학>을 집필 중이고 한신대에서는 ‘떠돌이문제연구소’도 만들 예정이다. “떠돌이들이 세계화에 대항하는 길은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 대안으로 채식을 결심하듯, 개개인이 생활 속에서 결단을 해야 한다. 꼭 필요한 것만 자급자족하고, 소유보다는 나눔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동학에서 말하는 ‘기화’처럼 기가 통하면 생명이 탄생한다. 우리 민족은 동학 이래 고난 속에서 ‘악의 실체’를 체감해 온 만큼 그 대안도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일찍이 70년대 한신대 교수시절 ‘생명문화 공동체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뜻을 따르는 제자 다섯 가족과 서울 방학동에서 ‘새벽의 집’이란 둥지를 틀어 7년 동안 “신나게 축제처럼 살았다”. 그는 90년대 이후 퍼져가고 있는 ‘생태 공동체 운동’에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멋있는 ‘촛불’에서, 더 나아가 정치·생활화로 정착돼야 한다. 비판을 넘어 대안을 창출하는 시작이 돼야 한다. 지식인의 몫이다.” <한겨레>를 비롯한 언론의 책임도 당부한 그는 무엇보다 교회의 소명을 강조했다. “기독교인들이 산업문화에 가장 깊이 세뇌당해 개인 기복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교회는 더 욕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반성도 깊게 할 수 있다.” 김경애 기자,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교수·민중운동가·목사로 ‘근·현대사의 증인’ “난 목사가 되겠슴둥!” 1927년 성탄절, ‘동쪽, 곧 조선을 밝힌다’는 이름의 북간도 명동촌에서 이렇게 소리쳤던 여섯 살짜리 소년, 바로 문동환 목사다.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권사의 3남2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형 문익환 목사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선각자이자 민중신학자로 꼽힌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치지 않은 생명이란 무의미한 것’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는 그에게 고난의 삶은 당연한 길이었다. 일본신학교, 조선신학교를 거쳐 미국 하트퍼드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 박사 학위를 딴 그는 61년 한국신학대학 교수가 된다. 69년 유니온신학교 객원교수로서 남미의 해방신학, 흑인신학,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이론을 접하고 ‘민중신학’ 신념을 갖춘 그는 75년 ‘반유신’으로 해직된 뒤 한국 민중교회의 모태인 ‘갈릴리교회’를 공동설립한다. 76년 ‘3·1 민주구국선언’, 이른바 ‘명동사건’으로 22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79년 ‘와이에이치(YH)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투옥된다. 80년 ‘서울의 봄’에 한신대에 복직했으나 그해 9월 다시 해직당하고, 워싱턴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다 85년 두번째 복직한다. 1년 만에 정년 퇴임하고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중 88년 평민당에 들어가 ‘광주특위 위원장’ 등으로 4년간 정치 경험을 한다. 92년 대선을 끝으로 은퇴한 그는 ‘여생은 고향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아내 문혜림(미국 이름 페이 핀치벡)씨와 한 약속대로, 뉴저지주 블룸필드에서 살고 있다. 자서전과 신학 책을 쓰며 때때로 한인교회 초청 설교를 하며 지낸다. “건강은 워낙 약한 편이다. 심장이 약한 것은 가계력이다. 그런데 수술 이후 오히려 건강해졌다. ‘자기 고민만 하면 아프지만 남을 위해 살면 건강해진다’고 하신 부모님 말씀이 진리인 듯싶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퇴행적 대북정책 바꿔야 ‘6·15 공동선언’ 발표 8돌을 기념하는 민족통일대회 참석차 1년 만에 귀국한 문동환(87·사진) 목사는 13일 대회장인 ‘금강산’과 얽힌 일화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2005년 3월 결성된 ‘6·15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에서 재일 곽동의 한국민주통일연합 상임고문과 함께 재미 대표로 해외공동위원장을 맡은 그는 이후 해마다 6월과 8월, 한두 차례 고국을 찾는다. “6·15 공동선언은 인류사의 첫 사건이다. 총을 들고 서로 싸우던 적들끼리 ‘공멸’을 인식해 ‘평화’에 합의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로마제국에서 보듯 승자가 힘으로 지배하는 일방적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상생의 진리, 예수님의 가르침이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빨갱이’라던 김대중 선생이 김정일 위원장과 악수를 했지만 돌 대신 환호를 받았다. 민족적 각성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00년 6·15 선언 당시, 미국 뉴저지주 자택에서 처음 뉴스를 들었을 때의 감동을 떠올린 듯, 그는 “20세기는 세계대전 등으로 비참했지만 21세기는 평화공존의 시대다. 남미에서도 남아프리카에서도 한반도에서도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굉장한 사건이었다”라고 되뇌었다. 89년 3월 분단의 벽을 온몸으로 뚫고 ‘통일의 문’을 열어주고 떠난 세 살 터울의 형, ‘늦봄’ 문익환 목사가 이 순간을 함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새삼 그리웠던 순간이기도 했다. “애초 공동위원장 제안을 받았을 때, 팔순도 훨씬 넘어 ‘노욕’ 부리면 욕만 먹는다는 생각에 주저했다. 민간 차원의 자발적 활동이고 여비도 스스로 부담하는 일이라 잠시나마 힘을 보태기로 했다”는 그는 올해 새 단독 대표에게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랐는데 이명박 정부의 ‘퇴행적 대북정책’으로 애써 키워온 ‘6·15 정신’이 흔들리고 있다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문동환·문혜림씨 부부가 외동딸 영미씨가 살고 있는 경기 고양시 일산의 아파트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 미국인인 부인 혜림씨는 동두천에서 시작한 기지촌 여성들의 자립을 위한 ‘두레방’을 뉴저지주에서도 열어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을 돕고 있다.
‘촛불’로 대안세상 밝히길 교육가, 민중신학자, 민중운동가, 정치가 … 그는 파란의 근·현대사 속에서 누구보다 다채로운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얘기는 목회자로서 언제나 ‘하나님과 예수의 뜻’으로 모아졌다. “다국적 기업이 지배하는 산업문화 속에서 민중은 떠돌이 신세다. 중국만 해도 2억명이 떠돌이로 전락해 비참한 희생 속에 생존의 투쟁을 하고 있다. 이제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이 로마제국 아래서 떠돌이 유대인들을 이끌어 갈릴리에서 생명문화 운동을 역사했듯이, 최제우 선생 같은 선각자의 한마디면 충분하다. 김지하 선생이 말한 ‘각’도 새길이자 회개를 뜻한다. 시간이 흐르면 대중의 집단적 ‘각’이 이뤄진다. 6·10 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촛불집회도 그 깨달음의 과정이다.” 그가 80년대부터 주창해 온 ‘떠돌이 신학’은 이제 하나의 신학론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얼마 전 자서전 초고를 끝낸 그는 현재 <떠돌이 신학>을 집필 중이고 한신대에서는 ‘떠돌이문제연구소’도 만들 예정이다. “떠돌이들이 세계화에 대항하는 길은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 대안으로 채식을 결심하듯, 개개인이 생활 속에서 결단을 해야 한다. 꼭 필요한 것만 자급자족하고, 소유보다는 나눔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동학에서 말하는 ‘기화’처럼 기가 통하면 생명이 탄생한다. 우리 민족은 동학 이래 고난 속에서 ‘악의 실체’를 체감해 온 만큼 그 대안도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일찍이 70년대 한신대 교수시절 ‘생명문화 공동체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뜻을 따르는 제자 다섯 가족과 서울 방학동에서 ‘새벽의 집’이란 둥지를 틀어 7년 동안 “신나게 축제처럼 살았다”. 그는 90년대 이후 퍼져가고 있는 ‘생태 공동체 운동’에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멋있는 ‘촛불’에서, 더 나아가 정치·생활화로 정착돼야 한다. 비판을 넘어 대안을 창출하는 시작이 돼야 한다. 지식인의 몫이다.” <한겨레>를 비롯한 언론의 책임도 당부한 그는 무엇보다 교회의 소명을 강조했다. “기독교인들이 산업문화에 가장 깊이 세뇌당해 개인 기복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교회는 더 욕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반성도 깊게 할 수 있다.” 김경애 기자,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교수·민중운동가·목사로 ‘근·현대사의 증인’ “난 목사가 되겠슴둥!” 1927년 성탄절, ‘동쪽, 곧 조선을 밝힌다’는 이름의 북간도 명동촌에서 이렇게 소리쳤던 여섯 살짜리 소년, 바로 문동환 목사다.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권사의 3남2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형 문익환 목사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선각자이자 민중신학자로 꼽힌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치지 않은 생명이란 무의미한 것’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는 그에게 고난의 삶은 당연한 길이었다. 일본신학교, 조선신학교를 거쳐 미국 하트퍼드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 박사 학위를 딴 그는 61년 한국신학대학 교수가 된다. 69년 유니온신학교 객원교수로서 남미의 해방신학, 흑인신학,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이론을 접하고 ‘민중신학’ 신념을 갖춘 그는 75년 ‘반유신’으로 해직된 뒤 한국 민중교회의 모태인 ‘갈릴리교회’를 공동설립한다. 76년 ‘3·1 민주구국선언’, 이른바 ‘명동사건’으로 22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79년 ‘와이에이치(YH)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투옥된다. 80년 ‘서울의 봄’에 한신대에 복직했으나 그해 9월 다시 해직당하고, 워싱턴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다 85년 두번째 복직한다. 1년 만에 정년 퇴임하고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중 88년 평민당에 들어가 ‘광주특위 위원장’ 등으로 4년간 정치 경험을 한다. 92년 대선을 끝으로 은퇴한 그는 ‘여생은 고향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아내 문혜림(미국 이름 페이 핀치벡)씨와 한 약속대로, 뉴저지주 블룸필드에서 살고 있다. 자서전과 신학 책을 쓰며 때때로 한인교회 초청 설교를 하며 지낸다. “건강은 워낙 약한 편이다. 심장이 약한 것은 가계력이다. 그런데 수술 이후 오히려 건강해졌다. ‘자기 고민만 하면 아프지만 남을 위해 살면 건강해진다’고 하신 부모님 말씀이 진리인 듯싶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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