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민화협 사무실에서 정세현(오른쪽)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이 <한겨레> 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왼쪽)에게 10돌을 맞은 감회와 남북관계 전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10돌 맞은 민화협’ 정세현 대표 상임의장
‘10돌 맞은 민화협’ 정세현 대표 상임의장
북 민간지원 중요하지만
내부적 이념 소통이 최우선 남북관계 안정적 관리때
경제도 산다는 것 깨달아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 3일 창립 열 돌을 맞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0년을 맞은 민화협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엔 통일부가 있고 민간엔 민화협이 있다”고 말했듯이 지난 10년 험난했던 남북관계는 민화협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그러하듯이 지금 민화협도 어렵다. 그래서 열 살 생일을 맞는 민화협엔 축하보다 걱정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내미는 지난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민화협 사무실에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을 만났다. 그는 2005년 2월부터 4년째 대표 상임의장을 맡고 있다. 민화협은 햇볕정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0년 전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1998년 5월 첫 남북 차관급 회담이 열렸다. 정 상임의장은 그때 남쪽 수석대표였으나 회담은 결렬됐다. “가을에 이산가족 상봉을 약속한다면 바로 내일이라도 비료 20만t을 실은 배가 출항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 의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비동시·비등가·비대칭의 상호주의’였다. 그러나 북한은 그때만 해도 흡수통일에 대한 우려를 못 버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산가족 상봉이 몰고 올 파장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지금이야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교류·협력으로 신뢰가 축적돼서 빚 독촉 하듯이 이산가족 상봉을 요구하지만, 당시 북쪽은 목적 자체에 복선이 깔려 있는 정치적 요구로 받아들였습니다.” 북쪽 협상대표로 나온 전금철 대표단장은 “햇볕정책의 본심이 뭔가? 우리 녹여먹자는 거 아니요?”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 첫 회담의 결렬은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다. “햇볕정책이 북한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는 거를 보여줬고 보수세력의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있었죠. 8월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사건이 터지고 그달 말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만일 그때 남쪽의 비료가 갔다면 11월의 금강산관광 사업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국내에서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을 설득해 금강산 사업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고, 일본의 반대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민화협 결성을 위한 논의는 이 당국간 회담이 결렬된 직후 시작됐다. “북쪽의 햇볕정책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 화해·협력의 국내적 기반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보수를 끌어안고 남북관계를 풀어가려는 자세였습니다. 보수적인 인사인 강인덕씨를 첫 통일부 장관으로 내세운 것도 김 대통령의 용의주도한 용인술이었죠.” 그에 비춰 보면 실용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는 셈이다.
민화협은 본래 민족화해협력협의회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범국민’이란 표현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 그대로) 통일운동 단체의 협의체로서 200여 단체가 참여했습니다. 초기엔 극우·극보수·극진보도 있었습니다만 탈퇴했죠. 실제 활동에서도 북쪽과의 화해협력을 위한 민간 차원의 측면 지원도 중요하지만, 남쪽 내부의 이념적 편차와 갈등을 최소화하는 내부적 통합과 소통의 공간을 만드는 데 강조점을 뒀습니다. 그런 점에서 통일전선부의 외곽단체로서 대남 창구 구실을 하는 북쪽 민족화해협의회와는 다릅니다.” 정 의장은 그래서 민화협을 ‘지붕단체’라고 표현했다.
물론 남북 당국간 관계가 끊어졌을 때 민화협은 남북을 이어주는 다리 구실을 해 왔다. “당국간 남북관계라는 전등이 환하면 민화협이라는 촛불이 안 보이지만 전등이 꺼지면 밝게 빛납니다.” 정 의장의 이른바 ‘촛불론’이다.
그렇다면 당국간 대화가 막혀 있는 지금 그 촛불은 더 환하게 타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정부가 민간의 건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자세와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겁니다. 전깃불 나갔는데 성냥마저 안 주면 깜깜한 거죠. 게다가 바람이 불어 버리면 촛불도 꺼지는 겁니다.”
민화협은 앞으로 ‘고난의 행군’을 해야 할지 모른다. 민화협이 3일 창립 10돌 기념행사와 후원회 행사를 같이 하려는 것도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다. “보통 6~7월에 후원회를 열었는데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정부가 화를 내고 있으니 기업이나 기부단체들이 눈치를 봅니다. 올해는 안 될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미뤘죠. 요즘 통일운동 하는 단체들은 어디 가서 말 꺼내기조차 어렵습니다.”
이 정부 안에는 아직도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보는 시각이 뿌리 깊이 있다. “그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시기에 태어나 성장한 민화협은 사람 나이로 치면 이제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인데, 학비가 없어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좀 있으면 중학교로 진학해야 하는데….”
나라경제가 어려워져서 도움 받기가 쉽지 않을 텐데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경기가 어려워도 있는 사람들은 안 그렇습니다. 이분들 소비는 예전에 비하면 동그라미 하나가 더 붙습니다. 경제의 양극화 상황에서 부자들이 더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남북관계가 파탄으로 가지 않도록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경제에 도움이 됩니다.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는 나라의 신용등급이 내려가지 않도록 버팀목 구실을 해왔던 겁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2003년 2월 출범도 하기 전에 미국의 국제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로부터 장기 신용등급 전망을 포지티브에서 네거티브로 두 단계 내리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주식시장은 급락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때 무디스는 신용등급 하락의 이유를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에서 야기된 안보불안 문제’로 들었다.
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 kankan1@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거침없이 할 말 하는 비유와 풍자의 ‘달인’
정세현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은 요즘 말로 좀 살을 붙여 말하면 비유의 ‘달인’쯤 된다. 정곡을 찌르는 말도 많다. 금강산 피격사망 사건이 일어난 날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 개원 연설에서 6·15, 10·4 선언을 언급하며 전면적 대화를 제의하자 말이 많았다. 그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정책은 정책이고 사건은 사건입니다. 구별돼야 합니다.” 차라리 북한이 이 연설을 들은 뒤 총격사건을 일으켰다면 의도가 있느니 논란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날 일어난 건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건과 정책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하는 비유 속엔 풍자가 숨어 있는데 거침이 없고 할 말은 하기에 대체로 쓴소리가 많다. 이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비핵·개방·3000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비핵·개방·3000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정부로서는 버릴 수 없을 겁니다. 창고에 처박아 둘 수는 없겠지만 선반 위나 벽장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정부가 상생·공영의 대북정책을 내놓은 데 대해선 ‘쓴소리’가 아닌 ‘단소리’도 했다. “형식상으로도 내용상으로도 진전입니다. 김대중 정부의 화해·협력에서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으로 그리고 이명박 정부에서 상생·공영으로 간다는 건 진보입니다. 대북정책의 이름을 가운데 방점 찍고 네 글자로 항렬을 맞춰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마디 덧붙였다. “이것이 기계적 상호주의가 되면 또 공염불 됩니다.”
그는 유일하게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걸쳐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화해·협력 정책과 평화·번영 정책을 이어준 셈인데, 이 정부는 통일부를 해체하겠다는 발상에서 출발했으니 기대 난망인가.
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
내부적 이념 소통이 최우선 남북관계 안정적 관리때
경제도 산다는 것 깨달아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 3일 창립 열 돌을 맞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0년을 맞은 민화협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엔 통일부가 있고 민간엔 민화협이 있다”고 말했듯이 지난 10년 험난했던 남북관계는 민화협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그러하듯이 지금 민화협도 어렵다. 그래서 열 살 생일을 맞는 민화협엔 축하보다 걱정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내미는 지난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민화협 사무실에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을 만났다. 그는 2005년 2월부터 4년째 대표 상임의장을 맡고 있다. 민화협은 햇볕정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0년 전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1998년 5월 첫 남북 차관급 회담이 열렸다. 정 상임의장은 그때 남쪽 수석대표였으나 회담은 결렬됐다. “가을에 이산가족 상봉을 약속한다면 바로 내일이라도 비료 20만t을 실은 배가 출항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 의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비동시·비등가·비대칭의 상호주의’였다. 그러나 북한은 그때만 해도 흡수통일에 대한 우려를 못 버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산가족 상봉이 몰고 올 파장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지금이야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교류·협력으로 신뢰가 축적돼서 빚 독촉 하듯이 이산가족 상봉을 요구하지만, 당시 북쪽은 목적 자체에 복선이 깔려 있는 정치적 요구로 받아들였습니다.” 북쪽 협상대표로 나온 전금철 대표단장은 “햇볕정책의 본심이 뭔가? 우리 녹여먹자는 거 아니요?”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 첫 회담의 결렬은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다. “햇볕정책이 북한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는 거를 보여줬고 보수세력의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있었죠. 8월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사건이 터지고 그달 말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만일 그때 남쪽의 비료가 갔다면 11월의 금강산관광 사업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국내에서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을 설득해 금강산 사업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고, 일본의 반대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민화협 결성을 위한 논의는 이 당국간 회담이 결렬된 직후 시작됐다. “북쪽의 햇볕정책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 화해·협력의 국내적 기반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보수를 끌어안고 남북관계를 풀어가려는 자세였습니다. 보수적인 인사인 강인덕씨를 첫 통일부 장관으로 내세운 것도 김 대통령의 용의주도한 용인술이었죠.” 그에 비춰 보면 실용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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