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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반독재’ 거센 바람…다시 강단으로 / 문동환

등록 2008-09-22 18:55수정 2008-10-08 18:16

한신대에 두번째 복직한 이듬해인 1986년 4월, 예수의 수난을 재연하는 고난주간 예배를 위해 필자가 십자가를 진 채 행진을 하고 있다.
한신대에 두번째 복직한 이듬해인 1986년 4월, 예수의 수난을 재연하는 고난주간 예배를 위해 필자가 십자가를 진 채 행진을 하고 있다.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9-5
1984년 말부터 김대중 선생은 한국으로 돌아갈 뜻을 내비치곤 했다. 83년 8월 하버드에서 그와 가까이 지내던 필리핀의 반체제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이 귀국하려다 마닐라 비행장에서 암살을 당한 사건도 있었기에 모두들 만류했지만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그런데 때마침 전두환 대통령은 두번째 미국 방문을 계중이었다. 미 국무성에서는 김대중생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전두환의 방미도 허락할 수 없다고 압력을 가했다. 마침낸 김 선생은 85년 2월 8일 귀국하기로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비행기에 동승하겠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한국인 만이 아니라 미국 국회의원들까지 자원을 했다. 워싱턴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 민주당의 토마스 폴리기에타 의원, 전 엘살바도르 미국대사 로버트 화이트, 미 국무부 인권 부장관 페트리아 데리안 등 27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저명한 미국 지도자들이 동행을 하자 전두환 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덕분에 김 선생은 무사히 귀국을 했고, 나흘 뒤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 돌풍을 일으켜 신한민주당은 109석으로 제 1야당이 되었다.

그 얼마 뒤 김성재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 대통령이 민심 수습을 위해 해직 교수들의 복직을 허용했으니 어서 서울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당장이라도 고국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미국에 벌려 놓은 일들도 만만치 않았다. 워싱턴 수도교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만두고 가버린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발길을 붙잡은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미국에서 자신이 원하던 대로 사회사업가로서 신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학교에 돌아간다고 해도 1년 6개월이면 정년이었다. 하지만 안병무와 이우정을 비롯한 동지들은 내게 총장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신대는 종합대학으로 커지면서 수유리와 수원 캠퍼스로 확대되었다. 안 박사는 한신대가 우리가 꿈꾸던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고 늘 걱정이었다. 교수직은 65살에 끝나지만 총장직은 70살까지 할 수 있으므로 총장이 된다면 한국에 적어도 7년 동안 더 머무르게 될 수도 있었다. 한국으로 시집와 그 동안 희생한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늘 한국을 그리워해온 것을 잘 알았기에 귀국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84년 여름 서울로 돌아왔다. 이듬해 따라 들어오기로 한 아내와 두 가지 약속을 했다. 더 이상 문동환의 아내로서가 아닌 의미 있는 자신의 일을 하겠다는 것과 은퇴 이후에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아내는 70년대 미군부대에서 상담하면서 알게 된 기지촌 여성들의 버림받은 삶을 늘 잊지 못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조차 선뜻 들어가지 못하는 기지촌에서 아이들을 돕는 선교 센터를 구상했다. 미국연합교회와 기장 여신도회의 후원을 받아낸 그는 86년 의정부에서 ‘두레방’을 시작했다. 여성들에게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켜 직접 판매도 함으로써 자활을 돕는 곳이었다. 한신대 졸업생인 유복님과 함께 아내는 보람 있는 나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민중신학 연구하는 나 역시도 처음에는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편견 때문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여성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며 그 편견을 모조리 깨뜨려버렸다.

내가 없던 4년 사이 한국에서는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는 운동이 대학가는 물론 노동자와 농민층에서도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85년 3월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고 형 익환이 의장으로 취임했다. 형은 82년 12월 김대중 선생이 미국 망명을 할 때 함께 석방된 뒤 갈릴리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면서 두번째 단식을 하는 등 열성적인 반독재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민통련은 민주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25개 단체가 하나가 되어 전두한 독재와 대결하자는 실로 비장한 각오로 이룩된 조직이었다. 나는 순수한 시인이자 목사인 형이 과연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 구속자 가족들은 물론 젊은 대학생들도 쌍수를 들어 그를 지도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 모두를 껴안아 는 그의 넉넉한 품과 뜨거운 정열에 감동과 감화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한신대로 돌아왔다. 80년 봄 복직했으나 한달 남짓 만에 쫓겨났으니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10년 만이었다. 정대위 총장은 나와 안 박사에게 원로 교수라고 차를 보내주어 수원 캠퍼스로 편하게 출퇴근을 했다. 그러나 학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수유리 캠퍼스의 신학교 교수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편안한 대화가 이루어져 든든한 영적 동력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수들은 두 곳으로 왔다 갔다 하느라 서로 여유 있게 대화를 할 기회가 없었다. 교수들 사이에 끈끈한 연대가 없으니 대학에 활기가 있을 수가 없었다.

본래 우리는 한신을 종합대학으로 만들면서 여러 학과 교수들의 연구 결과를 중심으로 다가오는 21세기 교회의 선교 방향을 정립하고자 했다. 자본주의적 산업문화로 인한 빈부 격차, 생태계의 파괴, 한반도의 통일과 같은 여러 과제를 앞둔 시기에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무엇인가?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다. 각 과들은 나름대로의 계획에 따라 서로 경쟁을 했다. 다른 과에서는 신학과 위주로 학교가 운영된다며 불평을 했다. 이윽고 86년 9월 은퇴를 맞아 이장식 박사와 함께 명예교수직을 받았다. “21세기가 우리에게 제시할 도전은 엄청나게 클 것이요, 신학대학과 기독교장로회의 과제는 이에 응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 일을 몸과 마음에 힘이 넘쳐나는 후배들이 해 줄 것을 당부한다” 퇴임식 날 나는 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의 앞날에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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