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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죽비와 묵비’의 대결, 광주청문회 / 문동환

등록 2008-09-25 19:16수정 2008-10-08 18:15

1988년 12월16일 최규하 전 대통령(가운데)의 ‘광주 청문회’ 증언을 요구하고자 서울 서교동 자택을 방문한 필자(오른쪽)와 국회 특위 관계자들이 ‘출석 거부’ 답변만 듣고 집을 나서고 있다. 맨 뒤쪽으로 신현확 전 총리의 모습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12월16일 최규하 전 대통령(가운데)의 ‘광주 청문회’ 증언을 요구하고자 서울 서교동 자택을 방문한 필자(오른쪽)와 국회 특위 관계자들이 ‘출석 거부’ 답변만 듣고 집을 나서고 있다. 맨 뒤쪽으로 신현확 전 총리의 모습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10-3
1988년 2월 평민당 입당 행사에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익환 형이 말했다. “전에는 네가 나에게 솔직한 충고를 많이 해주었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너한테 충고할 테니 그리 알아!” 형은 “무엇보다도 통일에 관심을 가져야 해” 하며 내 무릎을 탁 쳤다. 형이 서야 할 자리에 내가 선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형이 있다는 게 무한히 고마웠다.

재야의 젊은 청년들과 함께 정치권에 들어가서 처음 맞은 도전은 4월26일 국회의원 선거였다. 김대중 총재는 내가 종로구에 출마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정치를 계속할 사람도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젊은 민주인사들의 입문을 위한 접목제로 들어온 것이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정치를 할 유망한 인물이 출마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나는 극구 사양했다. 대신 전국구 후보로서 전국을 돌며 특히 평민련의 후보들을 위해서 지지 연설을 했다. 강진의 김영진, 무안의 박석무, 광주의 정상용, 전주의 장영달, 성북의 이철용, 관악의 이해찬, 중랑구의 이상수, 노원구의 임채정 후보 등의 유세를 집중적으로 도왔다. 유세를 하다 보니 말주변이 좋은 정치가들은 쉽게 영웅주의에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중들이 아우성을 치면 호응해주는 순간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동분서주한 결과, 우리는 예상 밖의 결실을 얻었다. 평민당은 71석으로 일약 제1야당이 됐고 그 가운데 평민련 후보가 무려 20석이나 차지했다. 일단은 정계 입문의 명분을 얻은 셈이었다.

이후 4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아무래도 88년 11월 시작한 ‘광주 청문회’일 것이다. 지금도 택시를 타면 기사들은 내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로 ‘광주 청문회 위원장 하시던 분이 아니냐’며 반가워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만큼 광주 청문회에는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내 말투가 어눌하고 느리다며 답답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평민당에서 맡기로 한 날 나는 퍽 흥분했다.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김 총재는 내게 특위 위원장을 맡으라고 했다. 나는 광주에서 일대 참극이 벌어지고 있을 때 미국에 있었던 까닭에 당시 진상을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주저했다. 그러나 곧 이 중대한 역사적 사명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맡기로 결심했다. 11월18일 문을 연 광주 청문회는 이듬해 12월30일까지 일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특위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피해 시민들의 애끓는 증언은 청취자들의 공감과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김옥길은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해 우리를 크게 실망시켰다. 최규하 전 대통령도 끝까지 증언을 하지 않았다. 나는 최 전 대통령에게 직접 찾아갔다. 요지부동인 그에게 나는 “최 대통령은 역사가 뒤바뀌는 때 해야 할 일을 바르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역사 앞에 밝히는 일마저 하지 못한 비겁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고 말았다. 지금도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문동환 목사
문동환 목사
전두환 전 대통령도 백담사에서 ‘도를 닦느라’ 청문회에 나오지를 않았다. 이렇게 지지부진하던 특위는 89년 말 4당 총재들이 모여 전 대통령의 증언으로 청문회를 끝내기로 합의했다. 전두환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군 자위권 발동의 책임자를 밝혀야 했다. 우리는 그에게 51개의 질문을 보냈고, 그는 결국 청문회에 나와서 답변을 했다. 그러나 그는 질문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궤변만을 늘어놓았다. 야당 의원들의 반발로 여러 차례 청문회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차라리 전두환의 증언 청취를 거부함으로써 그의 불성실함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 낫겠다는 심정이었다. 약속한 12시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민중 출신의 국회의원 이철용이 증인석으로 뛰쳐나와 “전두환 살인마! 증언 제대로 해!” 하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하고 장돌뱅이처럼 살아온 그만이 할 수 있는 통쾌한 행동이었다. 나는 ‘민중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했던 프레이리의 말대로 민중 출신들이 국회에 많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가 공천되도록 도왔다. 그는 장애인이기도 하여 장애인고용촉진법 등의 통과를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나는 국회에서 그를 만날 때면 “민중의 승리야”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곤 했다.

그는 내가 아끼는 제자 중의 하나인 허병섭 목사가 빈민촌에 들어가 현장에서 키워낸 일꾼으로, 빈민들의 삶을 <꼬방동네 사람들>이란 소설로 세상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는 뒷골목에서 뒹굴며 자라나 감옥에도 들락날락한 차돌멩이같이 의지가 강한 친구였다. 허 목사 역시 의지할 데 없었던 젊은이로 한신대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기장 여신도회에서 그에게 장학금을 주어 학교에 다니도록 해 주었다. 그는 빈민 현장으로 들어가 동월교회를 세웠으며 빈민운동에 헌신했다. 그 뒤 그는 목사직을 반납하고 일용직 노동자들과 같이 건축 일을 하는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에는 시골에 내려가 생명대학을 꾸리고 있다.

광주 청문회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용두사미 격이 되었다. 단지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모든 국민들이 광주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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