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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잃은 것은 자유, 얻은 것은 말술 / 백기완

등록 2008-11-18 18:26

2000년 12월23일 ‘널마의 술꾼’으로 불린, 김태선 선생 추모의 밤 때 서울 명륜동의 단골 음식점에서 문화판의 술친구들이 모였다. 오른쪽부터 임진택·필자·김도현·방배추·유초하·주재환씨 등이다.
2000년 12월23일 ‘널마의 술꾼’으로 불린, 김태선 선생 추모의 밤 때 서울 명륜동의 단골 음식점에서 문화판의 술친구들이 모였다. 오른쪽부터 임진택·필자·김도현·방배추·유초하·주재환씨 등이다.
백기완-나의 한살매 33
젊은 날 나는 아무리 마셔도 비칠대진 않었다. 사내 녀석이 까짓 거 술 몇 모금에 맴쳐서야 (취해야), 그랬다. 이 때문에 술보다는 안주를 많이 먹는 투다. 국수 한 그릇을 놓고 네댓이 쐬주를 먹을 적이다. 침을 탁, 그릇째 후다닥하자, 저건 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먹취라고 주어 맞았다. 그런 내가 술을 마구 처넣게 된 때박(계기)은 군인들이 모든 대루(자유)를 빼앗을 때부터다.

나는 그때 4월 불쌈(혁명)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는 ‘아리아리’다, 그랬다. 그런데 군인들은 반공을 내세우며 우리가 끌던 손수레마저 빼앗고 ‘아리아리’의 숨통을 죄는 것이니, 얼마나 부아가 나는가.

그 꺽지(불길)를 다스린답시고 떨어지는 놈이 내기로 하고 하루는 좀 마셨다. 내 앞으로 쐬주 두 땅지(병), 빼갈 일곱 땅지, 거기다가 막걸리 한 되를 또 마시고 반도고실(여관·요즈음 롯데호텔) 앞을 지나는데 ‘코 큰’ 녀석들이 들락이느라 발부리에 밟힌다.

쭈빗해진 나는 마침 쌓인 벽돌 하나를 집어 올렸다 내렸다 하며 “너, 이 벽돌 맛 좀 볼래?” 싫단다. “그러면 꿇어 임마, 안 그러면 깐다”고 해 여남은을 꿇게 하고선 돌아오다가 뻑, 한 대 맞게 되었다. “누구야” 하고는 들이받았는데 깨어보니 수도를 고치느라 판 구덩이에 눈을 하얗게 맞고 누워 있다. 일어나며 혼자 웅질댔다. ‘술에 맴친 놈에게 보이는 건 깃줄대(전봇대)뿐이구나!’

잡혀가 된통 겪고 나온 날이었다. 명동 ‘팻숀’ 찻집에서 입술이 찰찰, 죽치고 있는데 ‘널마’(대륙·김태선) 녀석이 가잔다. “어딜?” “따라오기나 해.” 명동에서 구로동까지 걸어간 뒤 어느 구멍가게한테 쐬주 한 궤짝을 메고 오란다. “왜요?” “아무튼!”

그리하여 들어간 집은 부엌도 없는, 딱 눌데(방) 하나, 윗목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소쿠리가 있어 들쳤다. 갓 삶은 달걀 한 소쿠리다. 거기서 막소금 종기를 꺼내며 “자 들잔다.” 쐬주 한 궤짝이면 마흔네 땅지, 삶은 달걀은 삼백이니 실컷 먹잔다. 무어든 잘 먹는 ‘배추’(방동규)는 벌써 달걀 여남은을 꿀꺽, 나도 한 댓을 넘기는 것까지는 마냥 즐거웠다.

하지만 트림을 할 적마다 쐬주 냄새보다도 닭똥 냄새가 버거워 어릿어릿하는데 어디선가 웬 아낙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들린다. 들락(문)틈으로 보니 한 아낙이 쭈그리고 있다. 누구일까?

나는 볼일을 본다며 슬며시 나오면서 생각했다. ‘저 녀석 저건 술꾼일까, 아니면 모진 사내일까? 아무튼 구로동 역에 나가 팔려고 삶아놓은 것을 다 내놓고 마시자는 것은 무엇일까?’ 더듬다가 매듭을 지었다. 나 같은 좀팽이는 알려고 해선 안 되는 널마의 술꾼이다.


어느 날이다. 사내들이 모여 앉으면 덮개(외투)가 없는 것은 그 널마 녀석뿐이라. 어느 누가 남대문 시장엘 데리고 가 더듬한 덮개 하나를 걸쳐주었다. “마침 눈이 오는데 잘됐구먼!” 그러더니 며칠 뒤 구두닦이가 누가 날 오란다고 한다. 가보니 그 널마 녀석이 저분한 애들 한가운데 떡하니 앉아갖고 마시잔다. 나는 온몸이 밸밸하던 참이라 거퍼 마셨더니 그 맛이 눈물겨웠다. ‘녀석, 판판이 고맙단 말이야.’ 그런데 일어나 나오던 그 널마 녀석이 바로 그 얻어 입은 덮개를 술값으로 벗어놓고 앞서간다.

백기완
백기완
또 얼마 있다가다. 새벽길에서 만났는데 콩비지에 쐬주 세 땅지를 마시기에 그만 하라고 하니 “나 오늘 예순, 회갑이야 임마!” 눈물이 왈칵 했는데 녀석이 아프다고 해 찾아갔다. “어디가 아픈데?” 췌장쫄(암) 끝머리(말기)에 간쫄·위쫄·편도선쫄, 아무튼지 온몸이 몽땅 쫄 끝머리라는 패림(진단)을 받은 날, “야 배추야, 이제야말로 술을 삼갈 게 없으니 실컷 마시자우.” 그래갖고 코가 왜들어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엊그제다.

그런데 목덜미가 젓가락처럼 돼 있다. 하지만 수염을 말끔히 깎고서 나를 맞아준다. “널마야, 좀 눕지 그래?” “괜찮아.” 한참 있다가 또 그랬을 적이다.

“기완아, 나 이제 몇 날 안에 아주 누워. 너도 왔고 또 아직은 살아있으니 좀 앉아 있자구!”

그러더니 사흘 있다가 정말 죽고 말았다. 1998년 12월이었다. 그 두해 뒤 나는 ‘널마의 술꾼 기리는 밤’에서(주재환·강민·김승환·김도현·임진택·방배추·김용태·유초하·신경림·구중서·이행자) 한마디 했다.

“우리 널마는 다른 건 몰라도 살티(인생관) 하나만큼은 뚜렷하게 있던 녀석이다. 쫄 끝머리에서도 고침(병원)에 눕질 않고 꼿꼿이 앉아서 술을 먹다 죽은 널마야 이 새끼야! 삶이 그대로가 술인 너를 부르면서도 나만 오래 살겠다고 술을 끊은 이 초랭이나 후려치고 가지, 왜 그냥 가, 이 새끼 널마야!”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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