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2월 24일 장준하 선생이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개헌청원 백만인서명꺼리’ 선언문을 기습 발표하고 있다. 함석헌·김수환·홍남순·천관우·계훈제·김순경·김윤수·김지하, 그리고 필자 등 30명이 발기인으로 나선 이 운동은 본격적인 반유신 싸움의 시작이었다.
백기완-나의 한살매 44
유신막틀(독재)이라는 게 나온 날부터 어쩐 일인지 내 얼굴엔 무슨 새뜸(소식) 같은 밝빛이 서렸다. 보는 이마다 좋은 일이 있느냐, 아니면 주머니가 두둑한가 보지, 왜 그렇게 훤해? 그랬다. 하지만 나는 왜냐는 내 빛은 아니 비췄다. 속으로만 맞대(대답)를 했다.
유신막틀, 그것은 박정희의 마주재비(상여)다. 내 눈엔 그것이 보인다는 것이요, 그 때문에 마주재비하고 싸움은 딱 한 바탕만 붙어도 이긴다는 제밑(자신)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싸움엔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한다. 때문에 딴 델 쳐선 안 된다. 박정희의 헷술(약점)을 들이쳐야 한다. 무엇으로 치느냐, 반드시 목숨으로 쳐야만 하는데 쳐야 할 그 헷술이라면 무엇일까. 한 나라의 대들할(헌법)을 마개로 쓰고 있어 으스스한 것 같애도 그것은 검뿔빼꼴(제국주의)하고 싸워온 두백 해(이백 년)의 갈마(역사)를 거스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4달 불쌈’(4월 혁명)이 보여준 랭이서기(민중승리) 그 빛나는 제밑(자신)과도 맞서 있다. 더구나 유신막틀은 사람맴(민심)을 잃고 있는 것이 그 헷술이라, 그것을 치고 들어가야 한다.
그 조리(방법)는 무엇일까. ‘유신 대들할(헌법) 없애기’ 큰모임(조직)을 짤까? 아니다, 그것은 입때껏 해 온 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랭이 하나하나가 알기(주체)가 되는 조리여야 한다. 그건 또 무엇일까. ‘개헌청원 백만인서명꺼리(운동)’ 그래 갖고 먼저 굴낯(대표) 서른 사람을 묶고, 그네들이 모두 알기가 되어 랭이들의 새김(서명)을 받기로 한다는 짠틀(계획)을 꾸리자.
나는 장준하 선생한테 수락덤엘 가자고 했다. 그것이 1973해, 9월쯤, 내 나이 마흔한살 때였다. 아무도 없는 덤(산) 속에서 우리는 한마디로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서른 사람을 모을 것인가. 12월로 들어서면서부터 장 선생이 움직였다. 뜻말(취지문)을 신발 깔창 밑에 감추고 찾아가서 되도록 속으로 읽어보라고 내밀 것이요, 고개를 끄떡하면 새김을 받는데 맨 처음은 함석헌, 그 다음은 김수환·홍남순·천관우·계훈제·김순경·김윤수·김지하, 내가 꼬래비로 서른을 모았다.
언제 내댈(발표)것인가. 12월24일 아침 아홉 때결이 좋겠다. 어디서 할까. ‘기독교청년회관’(YMCA) 두걸(이층)을 밀고 들어가기로 하고 밀게(등사판) 따위를 살 돈을 마련코저 장 선생과 나는 양일동 선생을 찾았다. “돈 좀 주소.” “무엇에 쓸 거냐.” 누구한테 돈을 빌렸는데 오늘 꼭 갚아야 할 날이라고 둘러대자 시계를 빼주려고 한다. “아뇨, 됐습니다.” 하고선 종로의 진명출판사엘 가서 돈 몇 푼을 얻어 밀게도 사고 종이도 산 다음 장 선생 집으로 갔다. ‘개헌청원불기’는 허술이가 발락종이에 베끼고 김희로와 장호권이 밀게에 밀고 김윤수와 나는 거들고.
새벽에 한축(일단) 흩어졌다가 딱 여덟 때결에 ‘기독교청년회관’ 들락(문)을 대뜸 차고 들어갔다. 안맴(미안)하지만 어쩌랴. 그날이 바로 기독교의 갸운날(명절)이라 막는 이가 없었다. 그 자리엔 함석헌·계훈제·천관우·김동길이 오고 놀래 달려온 기자들 앞에서 장 선생이 불기(선언문)를 읽어내려 갔다. 기자 하나가 물었다.
“백만 사람한테 새김을 받는다니, 어떻게 하는 것이냐?” 장 선생이 말했다. “우리 서른 사람이 모두 알기(본부)요, 그러니까 누구든 흰 종이에 이름과 새김을 써 서른 알기 누구에게나 갖다 주면 됩니다. 다만 나 장준하가 그 서른 알기들이 모은 것을 모두는 일을 할 겁니다.”
“그럼 장 선생이 곧은알기(총본부)란 말입니까?” “아무렇게나 생각하시오.”
끝을 맺고 내려오는데 청년회관 분들은 손뼉을 치고, 놀랜 기자들은 따라오며 찍개(사진기)를 들이대고, 그때서야 맨 사람을 잡아다 패기로 이름난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재빨리 비켜 장준하·함석헌·계훈제, 그리고 나는 천안으로 달렸다. 거기서 김순경 박사가 사 주는 밥을 먹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저녁 새뜸(신문)에 우리 이야기가 난 것을 보고 나는 입을 열었다.
“이제 유신막틀은 낼판(결정적)으로 금이 갔습니다. 마치 무달(침묵)까지 삼키던 썩은 웅덩이가 쪼매난 돌멩이 하나에 깨지드키 말입니다. 하지만 내 목숨은 가만두질 않을 겁니다, 죽일 겁니다. 난 죽어서도 날래(해방)된 땅 위에 쪼매난 풀닢으로 돋아날 것이오니 여러분! 걱정 같은 것은 마시길 ….”
“어허, 백기완이 뚱속(욕심)이 많군, 함께 가야지” 하고 천안이 떠나가게 웃었다. 통일꾼

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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