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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 찾아서] 성직자 구속 알렸다고 또 구속 / 한승헌

등록 2009-02-17 17:57수정 2009-02-17 21:33

1974년 1월 당시 서종철 국방장관이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의 ‘재판’을 맡을 비상군법회의 심판관(현역 장교)들에게 임명장을 준 뒤 인사를 받고 있다.
1974년 1월 당시 서종철 국방장관이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의 ‘재판’을 맡을 비상군법회의 심판관(현역 장교)들에게 임명장을 준 뒤 인사를 받고 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31
 난데없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괴물에 놀라고 두려워서 멍했다. 치밀하다 못해 비열하기까지 한 대목에서는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중 하나가 ‘긴급조치 비방 처벌조항’이었다.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행위도 긴급조치 위반이라니, 이것은 절도죄를 비방하면 절도죄로 다스린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또 하나는 ‘긴급조치 위반행위를 남에게 알리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본다’는 조항이었다. 비유컨대 절도행위를 알리는 사람을 절도죄로 처벌한다는 것이니, 그런 장치를 고안한 사람의 천재성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근본적으로는, 헌법에 대한 반대나 개헌 청원조차 범죄로 보는 점에서 긴급조치는 이미 헌법 위반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유신헌법상의 긴급조치 조항에도 위반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긴급조치 위반행위를 널리 알렸다고 해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된 희대의 사건이 ‘종로5가’-‘남산’-‘삼각지’로 무대를 옮겨가면서 연출된 바 있었다.

 바로 전 회에서 얘기한대로, 기독교 성직자 6명이 유신헌법 철폐와 개헌 청원을 부르짖는 시국선언을 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자, 종로5가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계에서는 큰 충격파가 일었다.

 약수형제교회 김동완 전도사와 서울제일교회 권호경 목사는 서울 중구 오장동에 있는 한 다방에서 만나, 이해학 전도사 등 성직자 구속사건의 진상과 문제점을 전국 교회에 널리 알려 여론을 환기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개헌청원운동 성직자 구속사건 경위서’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전국 교회에 우송 배포하기로 하였다.

 작업은 기독교 관련 기관의 젊은이들과 신학생들이 맡아서 해냈다. ‘경위서’는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회 간사 이미경,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간사 차옥숭 두 사람이 문안을 작성하였고, 한국신학대학 기독교 교육학과 4년생 박상희가 타자를 쳤다. 그리고 등사와 발송은 김매자(이화여대 의학과 3년), 김용상(무직), 박주환(한국신학대학 신학과 4년) 등이 맡아서 했다. 지문을 남기지 않도록 장갑을 끼고 작업을 했는가 하면, 우편물을 서울에서 일괄 투함하지 않고 수취인 거주지에 가서 발송을 했다. 검거를 피하기 위한 묘안이었다.

 개헌 청원에 15년 징역이라는 정치적 극약처방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위반’ 사건이 연달아 기독교 쪽에서 터지자, 박 정권과 그 휘하 공안기관에서는 당황스런 속내를 ‘구속 기소’로 드러냈다.

 그건 예상한 대로였다. 각본에 따라 유인물 제작·발송에 관여한 8명은 모두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사건의 변호를 하겠다고 나서는 변호사가 드물 때여서, 앞서 구속된 성직자 6명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8명 전원을 모두 내가 변호하게 되었다.(먼저 사건에서나 이번 사건에서 다른 변호인이 나중에 개별 선임된 예는 있었다.)


 피고인의 몸으로 법정에 나온 그들은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의 불법성을 공격하면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굽힘 없이 주장했다. 그런데 참으로 뜻밖의 문답이 돌출했다. 단상의 심판관(현역 장교) 한 사람의 입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김동완, 저기 있는 이미경이 당신 애인 아니오?

 남녀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함께 하면, 혹시 그들 사이에 애인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들이 있던 시절이었다. 김동완 전도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아닙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차갑던 군사법정 분위기를 걷어차듯 폭소가 터졌다. 참 많은 시국사건의 법정을 드나들었지만 그날처럼 단상단하가 일치단결해서(?) 폭발적으로 웃은 적은 없었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확정된 판결은 이러했다. 김동완·권호경은 각 징역 15년, 박상희 징역 7년, 나머지 사람들은 징역 3년, 그중 이미경·차옥숭·김매자 세 여성은 집행유예 5년이었다.

 김동완 전도사는 훗날 목사로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를 역임하는 등 중책을 맡아 고생을 하셨는데, 연전에 갑작스럽게 타계하셔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이미경 간사는 그 후에도 민주화운동, 여성운동에 줄곧 헌신하다가 지금은 3선 의원으로서 민주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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