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 서울 화양동 모윤숙 시인댁에서 매달 모이던 문인들의 친목모임 ‘라운드 클럽’의 회원들과 함께했다. 왼쪽부터 남정현·김후란·윤병로·전광용·홍윤숙·김혜숙·박현숙·필자, 송지영·박용숙(맨 앞), 박진·안수길·박연희·김붕구·이현구·모윤숙·전숙희·김광섭씨 등이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32
나는 법조계 말고는 문학 분야 단체에 이름을 얹고 있었다. 본시 단체 선호형이 아닌데, 문인동네(문단)의 선배와 친구들의 권유로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등의 회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단체의 행사나 문인들과의 교분을 통하여 문학동네의 풍토에 젖어보는 것이 좋았다. 다만, 문인단체의 선거를 둘러싸고 감투 싸움에 파벌놀음까지 하는 일면이 있어서 실망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월간문학>에 ‘문학적 문인과 정치적 문인’이라는 글을 쓴 적도 있다.(1971년 1월호)
문인들의 순수한 친목 모임으로는 ‘라운드 클럽’이 생각나는데, 거기엔 제법 많은 문인들이 모이다 보니, 문학의 여러 분야와 세대를 망라할 정도로 면면이 다채로웠다. 1970년 가을부터 매달 한 번씩 화양동에 있는 모윤숙 시인 댁에서 모임을 했는데, 분위기가 파격적일 만큼 자유분방했다. 남녀노소 간에 그야말로 허물이 없이 담론도 하고 놀이도 했다. 이헌구(문학평론가), 박진(연극), 김광섭(시인), 안수길(소설가), 김남조(시인), 전숙희(수필가), 홍윤숙(시인), 김붕구·양원달(이상 불문학자), 전광용·이호철·남정현(이상 소설가)씨 등 20명이 넘었던 것 같다.
우리는 모이면 격의없이 문학 이야기, 세상 이야기, 그리고 친교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가 등장한 뒤에 은연중 각자의 성향이 드러나고 갈라져서 서먹해지더니, 이내 모임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념 지향이 아니어서 좋았는데, 결국은 이념(아니면 시국관 또는 현실인식)의 그림자 때문에 흩어지게 되었다.
모임과 무관하게 자주 뵙던 분은 안수길 선생이었다. 종암동 댁에 놀러도 가고, <북간도> 후편을 쓰고 계시던 성북동 임시 거처에 양주 한 병을 갖고 찾아뵌 적도 있었다. 또한, 안 선생님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소설가 최인훈·남정현·박용숙씨 등과도 가끔 만났다. 야간인 명성여고에 나가던 신동엽 시인은 내가 있거나 없거나 사무실에 들러 책이나 신문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장시 ‘금강’이 실린 <신한국문학전집>을 들고 와서 서명을 해 준 적도 있다. 고은 시인도 내 사무실이나 종로의 ‘낭만’(비어홀) 같은 곳에서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문학평론가 백철 선생은 1975년 내가 징역 살고 나와서 실업자로 있으면서 한국저작권연구소를 개설할 때 여러모로 도움을 주셨다. 전주의 신석정 선생은 나의 대학시절, 내 졸작 시를 신문에서 평가해주셨고, 어느 해 눈 내리던 겨울 날, 전주 시내 찻집까지 신간 시집 <산의 서곡>을 가지고 나오셔서 건네주신 일도 있었다. 전북대의 대학신문 창간 때 인연을 다진 최승범 시인은 줄곧 저서를 주고받는 사이며, 지금도 전주에 갈 적마다 찾아뵙는 선배이시다. 수필가 김소운 선생은 일본에서 귀국하신 뒤 자주 뵈었고, 일본에서 출판된 <김소운 대역 시집>(부제; 한국 현대시 일본어 대역)에 내 변변치 않은 작품(시) 몇 편을 넣어 주시기도 했다. 유주현(소설가), 홍윤숙, 이어령(문학평론가), 박연구(수필가)씨 등은 75년 내가 반공법 필화에 걸려서 법정에 섰을 때, 나를 위해서 소신껏 증언을 해 주셨다. 내가 광주에 가면 숙소에까지 찾아와서 식사와 정담을 나누던 소설가 한승원씨는, 지금도 시골에서 꾸준히 집필을 하는 가운데 소설책 신간이 나오면 잊지 않고 보내 주시곤 한다. 극작가 이근삼 교수와 차범석 선생은 나에게 연극의 세계를 기웃거리게 해 주셔서, 그 덕분에 극단 ‘가교’와 ‘산하’ 등 이름 있는 극단의 공연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다. 나에게 계속 시를 쓰라고 격려해 주신 분으로는 전에 말한 김남조 선생 외에도 <현대시학> 주간이던 시인 전봉건 선생이 생각나는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나로서는 자책감을 지우기가 어렵다.
변호인과 피고인 사이로 만나서 더욱 가까워진 문인으로는, 남정현·천상병·김지하·임중빈·이호철·임헌영·정을병·송기원·김진경·고은·문익환·마광수·황석영(이상 사건의 재판 순) 등 여러 분이 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은, 나의 세 가지 복 가운데 ‘사람 복’이 들어간 사연을 알게 되었을 줄 믿는다. 그렇게 많은 문인들과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학적 농사’에는 소출을 올리지 못해서 부끄럽다. 그러나 문학 아닌 문인들과의 얽힘에서도 많은 배움과 깨달음과 보람을 얻을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행운이자 행복이었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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