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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 찾아서] 문인들 겁주려 ‘간첩 조작’ / 한승헌

등록 2009-02-19 18:23수정 2009-02-19 19:24

1974년 4월 재일본 한국어 잡지 <한양>에 얽힌 이른바 ‘문인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피고인들이 법정에 섰다. 이호철·임헌영·김우종·장백일·정을병씨.(오른쪽부터)
1974년 4월 재일본 한국어 잡지 <한양>에 얽힌 이른바 ‘문인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피고인들이 법정에 섰다. 이호철·임헌영·김우종·장백일·정을병씨.(오른쪽부터)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33
유신헌법 개헌 청원운동을 징역 15년으로 다스리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나오고, 재야와 개신교 인사들이 속속 잡혀가는 판에 이번에는 문인 몇 사람이 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에 붙잡혀 갔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씨는 1974년 1월 17일 밤, 보안사 서빙고동 분실로 연행되었다. 그는 그 며칠 전 문인들의 유신헌법 개헌서명에 참여한 터여서 그 때문인가 했으나, 중앙정보부가 아닌 보안사에서 칼을 뺀 것으로 보아 다른 문제를 사건화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긴장했다. 그러나 수사의 초점이 일본에서 발행되는 한국어 잡지 <한양>과의 관계임을 알고 내심 마음이 놓였다.

그 잡지의 발행인은 시인 구상 선생과 절친한 김기심씨였고, 62년 3월에 나온 창간호에는 ‘5·16 혁명공약’이 실렸는데다, 국내 문인들 중에는 일본에 가서 그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온 사람이 많았다. 72년 3월 창간 10돌 기념호에는 박종화·백낙준·백철 등 국내 저명인사 여러 명의 축사가 실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조사실의 분위기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한양>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용공사범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가혹행위도 서슴지 않는 험악한 판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 사건이 보안사에서 검찰로 송치되던 날, 나는 서울지검 정명래 부장검사가 기자들을 불러놓고 발표를 하는 그 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사건 명칭부터가 놀랄 지경이었다. ‘문인 지식인 간첩단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표현이 심상찮은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구속자 5명 중 개헌서명에 참여한 임헌영, 이호철(소설가) 두 사람에게는 국가보안법 위반에다 간첩죄까지 얹었고, 개헌서명을 하지 않은 김우종·장백일(이상 문학평론가), 정을병(소설가) 세 사람은 국가보안법으로만 송치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검찰이 기소할 때는 간첩죄 부분은 빠져 있어서 보안사가 얼마나 사건을 부풀렸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공소사실을 요약하면, 피고인들이 국제회의나 세미나 등에 참석하느라 일본에 갔을 때, <한양>의 두 김 씨로부터 향응과 돈을 받고, 그때를 전후하여 <한양>에 기고를 함으로써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누구를 만나고, 식사를 하고, 원고료를 받은 일은 있지만, <한양>의 두 김 씨가 북한과 연결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모른다고 했다. 그 잡지에 기고한 국내의 필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그 대부분이 중량급 인사들이었다. 그들도 일본 가면 잡지사로부터 대접도 받고 고료도 받았으며, 두 김 씨의 정체를 의심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잡지사 운영자금도 조총련과는 무관하게 ‘한양원’이라는 음식점 경영으로 얻는 수입과 한국거류민단계의 협찬광고로 충당해 오고 있었다. 남한의 시책이나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반국가 단체의 위장 출판물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실은 시인 구상·양명문, 평론가 백철·조연현, 소설가 손소희, 정치인 김상현, 영화감독 문여송 등 한국 문단의 원로급 인사들의 법정 증언으로 의문의 여지가 없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검찰은, “어느 간첩이 ‘내가 간첩이다’라고 정체를 드러내겠느냐”고 했다. 참 어이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한마디 했다. “그렇다고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간첩이라는 논법은 성립될 수 있는가?” 그 잡지가 국내에도 수입이 허용되었는가 하면, 일본의 한국문화원 열람대에도 전시되어 있던 사실에 대해서는 검찰도 아무 말을 못했다.

나는 구속된 문인 다섯 사람과 문단 교우를 통해서 잘 아는 처지였는데, 그 중 이호철·임헌영·정을병 세 분의 변호인이 되었다. 그러나 피고인 전원에 공통되는 혐의가 대부분이었음으로 사실상 전부를 변호하는 마음으로 변론을 했다.

이 사건을 두고 문단 안팎에서는 문학관이나 시국관의 차이를 초월해서 들고 나섰다. 서정주·최정희·황순원·김소운씨 등 중진급을 비롯한 많은 문인·지식인들이 당국에 진정서를 냈다. 국제앰네스티와 일본·서독·미국·노르웨이 등 외국에서도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그러나 판결은 정을병씨만 무죄였고 나머지 네 사람은 유죄였다. 이호철씨는 징역 1년6월, 장백일씨는 징역 1년의 실형이었고, 임헌영씨와 김우종씨는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이 사건은 문인들에게 겁을 주는 단기 효과를 거두었을지는 모르나. 박 정권의 탄압본색을 드러내는 정치적 자충수가 되기도 하였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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