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민청학련운동 계승사업회 간부들이 1974년 대구 경북대 재학 중 이른바 ‘인혁당 사건’으로 전격 처형된 여정남씨의 무덤을 찾았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35
내가 변호한 그 젊은이,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서 싸우다가 박정희 정권의 ‘역모 조작’에 몰리어 형장에서 통한의 삶을 거둔, 아! 그 이름 여정남!
1975년 4월 9일 새벽, 인혁당 재건위(이하 인혁당) 사건의 사형수 8명이 천인공노할 ‘사법 살인’으로 숨져간 죽음, 그 가운데 그가 있었다.
74년 4월,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 뒤 ‘민청학련 사건 수사 상황’이란 것을 발표했다. 거기에 보면 “과거 공산계 불순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정부 전복 및 국가변란 사건의 배후”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 ‘인혁당 배후설’에 맞추느라고, 경북대 학생 여정남군은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이의 ‘연결고리’로 설정되어 민청학련 사건에 끼여 있었다.
나는 (인혁당 사건의 피고인들이 아닌) 여정남군의 항소심 변호를 맡게 되었다. 그의 1심 변호인이던 강신옥 변호사가 군법회의 변론 도중 구속되는 바람에 내가 ‘인계’를 받은 셈이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 검거된 인혁당 관계자들은 주로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혁신계 인물들로서, 그들은 민청학련의 유신 반대 투쟁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그들 피고인 22명 가운데 도예종·서도원·하재완·이수병·김용원·우홍선·송상진, 이렇게 7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민청학련 사건에서는 유일하게 여정남군만이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여정남군은 경북대 재학 중이던 65년 한-일 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했고, 그 후 필화사건과 포고령 위반 등으로 연이어 구속당한 전력이 있었다.
이번 그에 대한 혐의는 조작투성이였다. 그가 서울에 와서 이철·유인태 등을 만나 화염병 제조나 각목 사용을 지시했다거나 민족지도부 구성을 논의했다는 것도 온통 조작이었다. 하재완과 무슨 자금을 주고받거나 지도부 구성을 협의했다는 것도 날조였다. 여군은 법정 진술과 항소 이유서에서 몸서리치는 고문·협박의 참상을 폭로하면서 억울한 혐의를 벗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마이동풍이었다. 전반적으로 피고인들의 진술은 법정에서조차 제지를 당했고, 피고인 쪽 증인 신청은 무조건 기각되는가 하면, 검찰 쪽 증인은 변호인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비밀리에 신문했다.
군법회의나 마찬가지로 대법원에서도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75년 4월 8일, 그날 대법원에서 인혁당 사건 피고인 가운데 위의 7명과 민청학련 사건 피고인 여정남군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었고, 선고 18시간 만에 그들은 형장으로 끌려가 불귀의 몸이 되었다. 그때 여군의 변호인이던 나 역시 반공법으로 구속되어 그들과 같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들이 저승의 문으로 끌려가던 그날 새벽, 나는 그런 형 집행은 꿈에도 모른 채 같은 감옥의 다른 사방(舍房) 마룻장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대법원 판결이 나던 그날, 선고 8시간 전인 새벽 3시, 대법원의 사형선고 통지서가 이미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되었고, 서울구치소에 보낸 형집행지휘서 접수인에는 (4월) 8일을 9일로 고친 흔적이 역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기가 막히는 ‘재판놀음’이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인혁당 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이 당시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북한 방송을 듣고 녹취한 노트를 돌려본 점이 위법이라고 해도, 이에 대해서는 반공법을 적용할 수 있음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건의 조작은 그 성격상 상부 지시 없이는 불가능하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형 집행은 박 대통령에게도 보고되었음을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인혁당 사건의 재심 공판은 2006년 3월 20일, 억울한 처형 31년 만에 열렸다. 그리고 2007년 1월 23일 피고인 전원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되었다. 나아가서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상당 액수의 배상금 지급 판결도 나왔다. 그러나 한 번 가신 원혼들은 다시 살아오지 못하니, 과연 ‘사법 살인’의 죄과 또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사법 살인’에 희생된 고인들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30년이 넘는 긴 세월 한마음 되어 싸워온 유족들에게 새삼 위로와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또한 그분들과 아픔을 함께한 사회 각계 여러분의 투쟁으로, 비극의 당대에서 이만한 ‘역사 바로잡기’가 이루어졌다고 보아, 마음에 새겨둘 만한 소중한 역사 체험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승헌 변호사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대법원 판결이 나던 그날, 선고 8시간 전인 새벽 3시, 대법원의 사형선고 통지서가 이미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되었고, 서울구치소에 보낸 형집행지휘서 접수인에는 (4월) 8일을 9일로 고친 흔적이 역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기가 막히는 ‘재판놀음’이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인혁당 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이 당시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북한 방송을 듣고 녹취한 노트를 돌려본 점이 위법이라고 해도, 이에 대해서는 반공법을 적용할 수 있음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건의 조작은 그 성격상 상부 지시 없이는 불가능하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형 집행은 박 대통령에게도 보고되었음을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인혁당 사건의 재심 공판은 2006년 3월 20일, 억울한 처형 31년 만에 열렸다. 그리고 2007년 1월 23일 피고인 전원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되었다. 나아가서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상당 액수의 배상금 지급 판결도 나왔다. 그러나 한 번 가신 원혼들은 다시 살아오지 못하니, 과연 ‘사법 살인’의 죄과 또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사법 살인’에 희생된 고인들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30년이 넘는 긴 세월 한마음 되어 싸워온 유족들에게 새삼 위로와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또한 그분들과 아픔을 함께한 사회 각계 여러분의 투쟁으로, 비극의 당대에서 이만한 ‘역사 바로잡기’가 이루어졌다고 보아, 마음에 새겨둘 만한 소중한 역사 체험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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