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긴급조치 4호 사건으로 15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던 연세대 김동길 교수(오른쪽)가 이듬해 2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자 누나인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왼쪽)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36
긴급조치 4호로 꾸며낸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이 나라의 거물급 인사들이 그 배후 인물로 찍혔다. 자금 제공자로 윤보선 전대통령, 박형규 목사, 지학순 주교가, 배후 선동자로 연세대의 김동길·김찬국 두 교수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윤보선씨만 빼고 나머지 분들은 모두 구속된 상태였다.
1970년대 전반의 긴급조치 탄압시대를 전후하여 김동길·김찬국 두 교수는 양심과 용기 있는 학자와 목사로서 학생들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73년 후반부터 유신헌법 철폐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긴급조치를 비방하고 제자들에게 학생시위를 충동·격려함으로써 내란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잡혀갔으니 예사롭지가 않았다.
나는 비상군법회의 1심에서 김동길 교수의 변호를 맡았다. 김찬국 교수도 함께 변호해야 할 처지였으나 가족이 이미 다른 변호인을 선임했기에 그냥 넘어갔다.
김동길 교수에 대한 혐의는 제자인 김영준·김학민 두 학생에게 “긴급조치 1호로써 박정희씨는 스스로 묘혈을 판 것이다”라고 말하여 긴급조치를 비방하고, “학생시위를 치밀하고 대담하게 전개하여 박 정권을 타도하라”고 격려하여, 내란을 선동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명연설을 함으로써 법정 안을 감동으로 채웠다. “… 이 법은 아무리 지키려 하여도 지킬 수 없는 법이라고 봅니다. 나를 풀어주시어 밖에 나가도 유신을 반대하다가 또다시 붙잡혀 올 것이 명백한 터에, 어찌 무죄 석방으로 이 자리를 면하게 되기만 바라겠습니까? 들락날락하지 않고 그냥 눌러 있는 것이 본 피고인이 원하는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무슨 죄를 주셔도 불평 없이 감수할 것이니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김찬국 교수도 유신 비판의 정당성과 학생 선동 운운의 사실무근을 단호하게 주장했으며, 학생들의 석방을 호소하는 것으로 최후진술을 끝마쳤다.
판결은 김동길 교수에게 징역 15년, 김찬국 교수에겐 징역 10년이었다. 김동길 교수는 1심 선고 당일로 항소를 포기해 버렸다. 15년형을 받고 두말없이 항소를 포기하다니,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법이 법 같아야지 ….”
한편, 김찬국 교수는 그 제자들이 민청학련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수사·정보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고지죄’까지 추가되어 있었다. 그는 김동길 교수와는 달리 항소를 했는데, 그 이유가 남달랐다. 1심 때 그의 변호인이 “피고인은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는 잘 알지만, 한국적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본 건과 같은 행위를 한 것이니 관대한 처벌을 해 주기 바란다”고 변론을 했다. 그는 이런 변론에 실망한 나머지 항소심에 가서 올바른 변론을 듣고 싶어서 불복을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판사의 판결에 불복했다기보다는 변호인의 변론에 불복해서 항소를 한 셈이었다.
나는 그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항소심 변호인이 되어 고등군법회의 법정에서 그분의 신념과 입장을 속시원히 대변하는 변론을 했다. 그런 변론의 ‘역효’를 각오했는데, 판결은 1심의 형량이 절반으로 준 징역 5년이었다. 이들은 다음 해 2월 검찰의 형 집행정지 결정으로 다른 민청학련 수감자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두 분의 변호인이던 나는 75년 3월,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항소심에서 겨우 풀려나온 뒤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당하고 실업자가 되었다. 그런 시기에 그 두 분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참으로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내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김동길 교수는 친누이인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을 모시고 갈현동 언덕배기 빙판 비탈길을 무릅쓰고 우리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가족들을 위로해 주셨다. 또한 김 교수는 내가 석방된 후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출판(업)을 시작할 때, ‘삼민사’라는 출판사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베스트셀러 저자로서 여러 출판사가 그의 원고를 받고자 경쟁이 치열했을 때, 내 어설픈 처지를 걱정한 나머지 나에게 그 귀한 원고를 내주셨다. 삼민사의 출판 제1호 <길을 묻는 그대에게>는 그런 사연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그 책이 나와서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하자, 문화공보부는 ‘판금’(판매금지)이라는 법에도 없는 탄압을 서슴지 않았다.
김찬국 교수는 삼민사에서 낸 한 종교 서적의 역자가 되어주셨고, 또 목사로서 많은 위로와 정을 베풀어주셨다. 도움을 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분들이었다.
한승헌 변호사
나는 그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항소심 변호인이 되어 고등군법회의 법정에서 그분의 신념과 입장을 속시원히 대변하는 변론을 했다. 그런 변론의 ‘역효’를 각오했는데, 판결은 1심의 형량이 절반으로 준 징역 5년이었다. 이들은 다음 해 2월 검찰의 형 집행정지 결정으로 다른 민청학련 수감자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두 분의 변호인이던 나는 75년 3월,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항소심에서 겨우 풀려나온 뒤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당하고 실업자가 되었다. 그런 시기에 그 두 분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참으로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내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김동길 교수는 친누이인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을 모시고 갈현동 언덕배기 빙판 비탈길을 무릅쓰고 우리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가족들을 위로해 주셨다. 또한 김 교수는 내가 석방된 후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출판(업)을 시작할 때, ‘삼민사’라는 출판사 이름을 지어주셨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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