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김대중(맨왼쪽)씨의 대통령 선거법 위반 사건 1심 재판장에 대한 피고인 쪽(오른쪽 세번째가 필자)의 기피신청 사건을 심리하고 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37
1974년은 서막부터 분주하게 뛰어야 했다. 이미 썼듯이 새해가 열리자마자 대통령 긴급조치 1호·4호로 절정에 오른 개헌운동 탄압, 민청학련 사건, 문인간첩단 사건 등의 변호를 맡아 정신이 없었다. 한편으로 내가 창립 이사로 있는 한국앰네스티 일도 거들어야 했다. 그 와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에 대한 선거법 위반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으니, 심리적 부담 못지 않게 업무량 폭주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해 5월 말쯤, 당시 한국앰네스티 이사장이던 이병린 변호사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나를 찾아온 분은 이희호 여사였다. 그 분의 눈짓으로 승용차 안으로 들어갔더니, 문서를 하나 보여주신다.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온 소환장이었다. 김대중 선생에 대한 선거법 위반 사건 공판을 6월 모일 모시에 열겠으니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김대중 선생은 그 전 해인 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원한테 납치돼 죽음의 고비를 넘어 닷새 만에 동교동 자택으로 생환한 뒤, 외부활동이 금지된 채 칩거중이었다. 정부는 엄폐수사로 일관하여 국내외의 의혹을 더욱 심화시켰는가 하면, 일본 정부는 김 선생의 ‘원상회복’, 즉 도일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단계에서 이미 몇 해째 묵혀두었던 재판을 하겠다는 것은 일본 쪽의 ‘원상회복’ 요구를 거부하기 위한 구실이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사건의 내용인즉, 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신민당 윤보선 후보를 위한 찬조연설을 트집잡은 대통령 선거법 위반과, 70년 6월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선거 유세를 하면서 여당 후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 혐의 사실이었다.
7년 만에 열리는 공판에 나서는 변호인단은 박세경·유택형·이택돈·한승헌. 이렇게 네 변호사로 짜여졌다. 공판이 열리는 날은 내가 아침 일찍이 동교동에 가서 김 선생과 그날의 공판에 관해서 협의하고 함께 법원으로 나가곤 했다. 간혹 중앙정보부 고위 간부가 그 시간에 동교동 그 댁에 와 있다가 나를 보고는 “오늘은 좀 적당히 해 달라”며 간청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재판이 무엇에 쫓기듯 매주 강행되는데다, 한번은 김 선생의 연설 녹음(테이프)을 검증하는 자리에서 재판장이 유죄 예단을 드러내는가 하면, 그 현장인 판사실에 정보기관원이 들어와 있는데도 내보내지 않는 등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피고인 쪽에서는 이런 사유를 들어 재판장에 대한 기피신청을 냈다. 그 후 대법원에서 원심의 기각 결정을 파기 환송한 데 따라 74년 12월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피고인 쪽의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짐으로써 1심 재판장이 바뀌는 파문이 일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3월, 내가 갑자기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나는 그 재판의 법정에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구속된 지 나흘 뒤인 3월 25일, 아홉 달 동안 중단되었던 그 사건 재판이 다시 열려 전후 27회 공판까지 가는 대장정이 계속되었다. 김 선생은 시종일관 공소사실을 부인하였고, 사건의 정치 보복성을 부각시켜 나갔다. 75년 12월 13일에 선고된 판결은 금고 1년이었고, 이에 피고인이 불복하여 항소심에 올라간 이 사건은 장기간 방치되었다가 88년 2월 5일, ‘재판 시효’(검사의 공소 제기 후 확정판결 없이 15년 경과)가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이 났다. 법원의 고충과 무책임이 뒤섞인 마무리 아닌 미결의 끝남이었다.
나는 이 사건 변호로 김 선생과 가까워졌다. 고난의 시기를 함께하면 그렇게 되기 마련이었다. 70년대 초입,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고 기억되는데, 그 후 월간 <다리> 창간 2돌 기념 순회강연을 함께 다닌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98년 3월, 내가 김대중 정부에서 감사원장으로 지명되자 거의 모든 언론이 대통령과 나와의 관계를 다룬 기사에서 ‘76년 명동 3·1 사건 변호로 김 당선자와 인연을 맺었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나는 당시 ‘명동’ 사건의 변호를 한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된 상태였기에, 그 사건 법정의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의 기상도, 우리의 마음도 모두 암울한 시절이었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