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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 찾아서] 감옥살이 깨침 ‘사람이 살고 있었네’ / 한승헌

등록 2009-03-04 18:18수정 2009-03-04 20:26

1975년 6월28일 국제앰네스티 네덜란드지부 회원들이 암스테르담에서 한승헌 변호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당시 국내 일간지 유럽특파원이 구해서 훗날 필자에게 전해준 사진이다.
1975년 6월28일 국제앰네스티 네덜란드지부 회원들이 암스테르담에서 한승헌 변호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당시 국내 일간지 유럽특파원이 구해서 훗날 필자에게 전해준 사진이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42
나는 서울구치소 2사(舍) 상 5방에서 감옥살이를 시작했다. 반공법 사건 전문(?) 변호사가 반공법에 걸려 수감되다니, 이것은 마치 한강의 수상안전 요원이 물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변호사라는 내 신분 덕분에 구치소에서 우대라도 받았나 싶겠지만, 실은 가슴에 붙은 빨간 네모 딱지(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표지) 때문에 지독한 차별을 당했다.

감옥살이 첫날밤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덜커덩하는 문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독방에 던져진 몸이 되었다. 얼떨떨했다. 희미한 백열전구가 높은 천장에 매달려서 저도 외로운 듯이 나에게 가냘픈 빛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사방 벽을 둘러보았다. 낙서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하루속히 자유를 찾으세요.” 마치 나에게 주는 위로의 덕담 같은 그런 말도 눈에 들어왔다.

우편엽서만 한 기독교 전도지에는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뭐, 사람을 낚는다고? 이렇게 낚여서 들어왔는데, 참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진 듯하여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방이라야 0.75평의 좁은 공간에 뼁끼통(변기)까지 놓여 있으니, 과연 감옥은 감옥이었다. 청결할 리가 없는 침구를 깔고 덮고 자리에 누워봤다. 천장에 매달린 전구는 밤새 졸면서도 켜진 채로였다.

문득 집 생각이 엄습했다. 지금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어린것들은 얼마나 놀라고 불안한 심경일까. 자식으로서 불효가 되고, 가장으로서 면목이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구나. 그러나 어차피 겪어야 할 고난이라면 부끄럽지 않은 자세로 이겨내고 나가야지, 나는 다짐했다.

이렇게 시작된 감옥살이는 아홉 달 동안 계속되었다. 시국사범이라서 불시에 나갈 가능성도 점쳐봤지만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심지어 변호인을 통해서 전달된 검찰총장의 석방 언질마저도 ‘부도’가 났다. 매일같이 식구통으로 넣어주는 ‘가다밥’(틀에 찍어낸 밥) 잘 씹어서 맛있게 먹고 건강관리 잘해서 시간과의 싸움에서 주저앉지 않도록 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잡혀 오기 전, 변호인 사퇴 요구를 거절했던 사건의 주인공, 김지하 시인과는 같은 버스를 타고 재판을 받으러 나가기도 했다. 첫 공판에 나갔다가, 법원 마당에서 통곡하며 쓰러지고 주저앉는 인혁당 사건 가족들을 호송차 유리창을 통해서 바라보았다.(바로 그날이 대법원에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의 사형이 확정된 날이었다) 그때의 통분과 아픔이 바로 어제 일만 같다.

바로 그다음 날 새벽, 인혁당 사형수 여덟 사람에 대한 형 집행이 있었고, 그날 낮 구치소 밖에서 울부짖고 외치는 비탄과 절규의 목소리가 감방 안에까지 들려왔다. 내가 변호했던 여정남군도 그렇게 억울하게 갔다.

평소 체력이 허약했던 나는 오래지 않아서 소화기능 장애와 탈진에 빠지기 시작했고, 보석도 기각된 상태에서 병사로 옮겨졌다. 의무과 옆 넓은 방에 간병인 서너 명(기결수)과 열 명 안팎의 환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말이 환자지, 그중에는 ‘나이롱 환자’(가짜)도 섞여 있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지내게 되니, 우선 말 상대가 있어서 심심치 않았다. 징역살이에 얽힌 이야기나 정보를 얻어들을 수도 있어서 유익(?)했다.


처음 공개하는 사연인데, 그때까지도 아내와의 접견이 되지 않아서 궁리 끝에 한 재소자의 도움으로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한 적이 있었다. 즉, 한 재소자의 부인을 통해 우리 집사람에게 모일 모시(운동시간)께 구치소 병사 맞은편 언덕으로 와서 어느 쪽을 보라고 전했던 것이다. 예정된 그날 그 시각, 나는 밖으로 나가서 약속된 산언덕을 눈이 빠지게 바라보았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전달이 안 되었나 싶어 포기하고 들어갈까 하는 순간, 아내의 모습이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워낙 거리가 멀어서 모습으로만 확인이 될 뿐인 ‘원격 상봉’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 반갑게 그리고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감옥 안에서 보고 겪은 일은 그야말로 극한상황 속의 인생 축도였다. 노여움도 있고, 눈물도 있고, 감동도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밖으로 내보냈다는 편지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감옥 속에서, 강도들 속에서 정말 참된 인간, 깊이가 있고 억세고 아름다운 성격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쓰레기 속에 파묻힌 순금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로서는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는 것, 저작권 공부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 등이 ‘국비 장학생’으로서의 소득이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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