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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 찾아서] ‘독방 독학’ 저작권법 밑천 삼아… / 한승헌

등록 2009-03-05 18:23수정 2009-03-05 19:17

1976년 11월 반공법 필화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변호사 자격이 박탈된 필자가 서울 덕수궁 입구 옛 법원 앞에 있던 법률사무소의 문을 닫는 날 짐을 싸고 있다.
1976년 11월 반공법 필화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변호사 자격이 박탈된 필자가 서울 덕수궁 입구 옛 법원 앞에 있던 법률사무소의 문을 닫는 날 짐을 싸고 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43
1976년 11월 23일, 내 필화사건이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유죄로 확정됨에 따라 나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 법이 그렇게 돼 있었다. 사무실의 책과 자료를 정리해서 화물차에 싣고 집으로 가는 순간에도 마음이 담담해서 스스로 놀랐다. 하지만, 왜 걱정이 없었겠는가?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 무엇을 해서 가족의 생계와 아이들의 교육을 감당할 것인가? 한 가장으로서, 한 생활인으로서의 부담과 고민이 밀려들었다.

그 독기 서린 정권 아래서 누가 나에게 생업의 문을 열어줄 리 없었다. 생각 끝에 어느 고시학원엘 찾아갔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좌를 안내하는 인쇄물들이 쌓여 있기에 그중 한 장을 집어서 들여다보았다. 내가 무슨 과목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나를 써주기나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선을 옮기고 있는데, 거기 안내 직원인 듯한 젊은 여성이 묻는다. “사시예요? 행시예요? 무슨 시험을 준비하시는데요?” 나는 순간적으로 반가움을 느꼈다. 아직은 내가 수험생으로 보일 만큼 젊다는 말 아닌가? 낡아서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몰지각하게도’ 가벼웠던 기억이 난다.

병원에 가서 진찰권을 끊고자 창구를 찾았더니, 주소와 이름을 묻는다. 은평구 갈현동 몇 번지,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다. 잠시 뒤 진찰권을 받아들고 돌아서다가 무심코 그 카드를 들여다보니 주소가 ‘가련동’으로 적혀 있지 않은가. 내가 실업자라 가련해 보였나? 병원에선 몸속의 병만 알아맞히는 줄 알았더니, 사람의 팔자까지 알아맞히는구나. 실업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또한번 웃었다.

요행히 일자리가 하나 생겼다. 한국사법행정학회란 데서 내는 <사법행정>과 <법정>이라는 법률잡지의 주간으로 나가게 되었다. 간행물 만드는 일은 내가 좀 아는데다 흥미도 갖고 있어서 해볼 만 했다. 잡지의 분야가 법률이라서 법조계나 법학계 쪽과 지면도 있는 나에게는 낯설지가 않았고, 내 능력과 적성에도 맞았다. 마침 내가 독학으로 전공한 저작권법 분야와 관련된 원고 청탁도 들어오고, 연수나 특강 의뢰도 있었다. 내가 남달리 저작권 분야를 공부하게 된 데는 이어령 교수의 권고가 적잖이 작용했다. 그는 머지않아 지식중심 시대가 오면, 저작권 문제가 크게 부각될 것이라며 그 분야의 공부를 해두면 나라에도 크게 이바지를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도 그런 예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구치소에서는 밖에서 넣어주는 책을 자기들 나름으로 선별하여 ‘불허’가 되면 재소자에게 전해주지 않는다. 그 기준이란 게 말도 안 되는 것이어서 더러 교도관과 언쟁도 하고 불평도 하지만, 그러다가는 징역살이에 필요한 에너지 소모로 지구력이 떨어져서 고생이 가중된다. 그래서 검열에서 트집잡힐 여지가 없는 저작권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들여다 읽게 되었다. 감옥 안에 있으면, 결혼 청첩장도 안 오고, 장례식장 조문 갈 일도 없으며, 전화도 안 오고, 여행 갈 데도 없다. 의식주를 나라에서 보장해 주는데다 안전사고 위험도 없다. 주는 밥 먹고, 식기 닦아서 엎어놓고, 운동하고 들어오면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러니 면학 분위기로는 최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최적의 환경에서 나는 저작권 분야의 책을 제법 많이 독파했고, 얼마쯤의 ‘밑천’을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석방이 되고 보니, 마침 우리나라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저작권 보호 압력에 시달리던 때였는데다, 아직 저작권 전공자가 드물었던 탓으로 나 정도의 독학자가 무슨 전문가 비슷한 대우(평가?)를 받게 되었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나는 좀더 그 분야에 이바지하고 싶은 의욕에서 한국저작권연구소를 설립했다. 여기에는 중앙대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백철 선생의 도움이 컸다. 저작권과 관련이 있는 여러 분야별로 자문위원을 위촉하고 창립행사도 했는데, 언론에서도 이를 반기는 기사를 써 주었다. 그 후 한국출판문화협회로부터 저작권법 개정안의 기초(起草)를 의뢰받아 저작권의 전면 개정안을 성안하고 공청회를 연 바도 있으며, 그 밖에 세미나, 상담 또는 언론활동 등을 계속했다.

나의 저작권 실력은 감옥살이 덕분에 업그레이드된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래서 ‘위기는 기회’라고 하는 것인가 싶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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