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법 필화사건에 대한 유죄판결 확정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실업자가 된 필자가 1978년 7월 아내 이름으로 가까스로 등록증을 받아 차린 출판사 ‘삼민사’ 앞에 서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44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나의 실업상태는 장기화될 조짐이 짙어갔다. 변호사회와 종교단체 같은 데서 생계비를 도와주기도 했고, 심지어 아이들 등록금을 마련해 준 분도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남의 자선이나 구호의 대상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고 보면 무언가 생업을 개척해야 했다. 그 무렵, 권력에 밉보여 직장에서 추방된 ‘백수’들 중에는 출판사를 차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왕 머리에 ‘먹물’이 들어 있는데다 영세한 밑천으로도 시작할 수 있다는 출판의 이점이 작용했다. 그런 시류(?)에 따라서 나도 출판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이름으로는 등록이 안 될 것 같아서 아내 이름으로 출판사 등록신청을 했다. 말이 등록제이지 실제는 허가제여서 불안했는데, 용케도 등록증이 나왔다. 나중에 듣기로는, 우리가 구청에서 등록증을 찾아온 직후 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달려와서 이것저것 경위를 따져 묻더니 이미 등록증을 내준 뒤라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돌아갔다고 한다.
도서출판 ‘삼민사’는 이렇게 해서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작명은 당시 반유신운동에 앞장서다가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으로 군법회의에서 15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석방된 연세대의 김동길 교수가 해주었다. 또한 삼민사의 창사 출판물 제1호인 <길을 묻는 그대에게>는 바로 김 교수의 글모음이었는데, 막 팔려나가는 초반에 법에도 없는 판금(판매금지)을 당했다는 사실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말이 출판사지, 자칭 주간인 나와 교정보는 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결국, 기획·원고의 청탁 수집·편집·교정·제작·영업 따위를 혼자서 책임지게 되었다. 그런 일련의 업무에 대해서는 범우사의 윤형두 사장한테서 배우고 또 도움을 받았다.
당시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각계 인사들이 나를 돕는 일념으로 귀한 원고를 내주었다. 예컨대, 함석헌(<씨알의 소리> 대표), 김재준·서남동·이현주·김득중(이상 목사), 안병무(신학자), 송건호·김중배(이상 언론인), 리영희·지명관·장을병·한완상(이상 교수), 김낙중(통일운동가) 등 명망 있는 분들이었다. 그들은 반독재·민주·통일 지향의 인사들이어서, 어쩌다보니 삼민사도 그와 같이 나라의 올바른 지향을 위한 출판운동의 일면을 맡게 된 셈이었다. 역사·종교·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주류로 하는 삼민사의 출판물은 언론과 서점가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나는 조판소, 종이집, 인쇄소, 제본소 등 이른바 ‘거래처’를 직접 뛰어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나에게는 힘겹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권력의 그림자가 나를 괴롭혔다. 앞서 말한 판금 파동에 이어 책 제목 시비도 있었다. 해방 이후 정치적 사건들의 재판을 다룬 한 언론인의 책에다 <끝나지 않은 심판>이란 제목을 붙였더니, 정보기관에서 트집을 잡았다. 왜 오래 전에 끝난 재판을 가지고 끝나지 않은 심판이라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함석헌 선생님의 동양 고전 풀이 <하늘땅에 바른 숨 있어>에서 ‘독재자’라는 단어 하나까지 문제 삼았다. 그때는 긴급조치 9호라는 것이 있어서 아무데나 걸게 되어 있었다. 나는 함 선생님을 찾아가 ‘어떻게 표현을 바꾸어 주실 수 없겠느냐’고 여쭸더니, ‘그거야 간단하지’라고 하시면서, ‘독재자’ 다음에 ‘들’자 하나를 써넣으시는 것이 아닌가? “이러면 특정인을 지칭했다고는 못하겠지”라고 하시는 함 선생님의 지적 순발력에 감탄한 바 있었다.
차 한 대도 없이 출판사를 꾸려나가기란 매우 힘들었다. 한번은 원효로에 있는 제본소에서 금방 나온 신간(‘견본’이라고 했다.) 20권을 들고 큰길가로 나와서 택시를 기다렸으나 잡히지가 않던 차에 작은 용달차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운전대 옆 조수석으로 올라가 앉으려 하자 기사가 말했다. “그 책뭉치는 뒤의 적재함에 실으세요. 이 차는 화물 용달이어서 사람만 태우지는 못합니다.” 이래서 나는 그날 책 20권의 ‘화주’ 대접을 받았다.
직원 채용 ‘3행 광고’를 보고 찾아온 한 젊은 여성이 딱하게도 청각장애인이었다. 직원이라야 딱 한 사람인데 그가 듣지를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고 그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런 1인 출판사인 줄 모르고 찾아왔던 그녀가 한사코 사양하는 것을 겨우 설득하여(물론 필담으로) 우리는 한 사무실의 ‘동료’가 되었고, 그의 놀라운 능력과 성실함에 나는 감사했다. 나 없는 동안의 통화는 막혔지만 방문객과는 필담으로 소통이 가능해서 다행이었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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