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3월 필자(오른쪽)가 서울 쌍문동에 있던 함석헌(왼쪽) 선생의 댁을 방문했다. 당시 민주화운동에 대한 의견을 구하거나 선생의 저서 출판 논의 등을 위해 종종 댁으로 찾아뵙곤 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45
삼민사 사주 겸 주간으로서의 출판 경험은 법조인인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외도’였다. 그러나 그 외도는 탈선이 아니었고, 나에게 적잖은 수확을 안겨줬다. 우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인심의 따스함과 차가움을 아울러 체험하게 돼 내 삶을 한층 더 성숙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그 환난의 시기에 고마운 일들이 많았다. 삼민사에서 함께 일한 여러 직원들(몇 해 뒤에는 직원이 세 명으로 늘었다)이 모두 마음씨 좋고 성실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임을 갖고 나와 함께 이룬 예전의 인연을 살려나가고 있다.
언론매체에서도 삼민사 책에 대한 서평이나 신간 소개를 후하게 실어 주어 큰 힘이 되었다. 영세한 출판사로서 광고를 내기 어려운 처지에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사보(社報) 쪽도 그 독자의 구매력이나 문화수준을 생각해서 열심히 파고 들었다.
흔히들 각종 매체 쪽에 여러 형태의 접근공세를 취한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나는 그럴 수는 없었고, 다만 원고 청탁이 있을 때는 ‘수교(修交)·보은’ 차원에서 성의를 다했다.
책방에서도 후대를 해 주었다. 출판 종사자라면 다 아는 일이지만, 아무리 좋은 책을 내도 책방에서 눈에 잘 띄게 배려해 주지 않으면, 독자와 만나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책꽂이에 꽂히는 것보다는 매장 좋은 자리에 (표지가 보이도록) 눕혀 주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매일 신간은 쏟아져 나오고 매장 진열공간은 한정돼 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했다. 그런 와중에 “책방에서 책 눕히기는 여자 눕히기보다도 어렵다”는 상스러운 우스개까지 나돌았다.
영세한 삼민사가 그래도 명맥을 유지하며 나의 감옥 재수(1980년 5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감되어 약 1년 복역)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범우사 사장인 윤형두 형 덕분이었다. 특히 제작 관련 거래처 관리와 판매 영업면에서 든든한 후견자가 돼 주었다. 그래서 나는 ‘삼민사는 범우사의 자회사 또는 신탁통치를 받는 회사’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불상사’가 일어났다. 외국의 종교서적을 번역하신 분이 아주 강골 민주투사로서 정권의 미움을 받고 있어서 자칫 그 책이 판금이라도 당할까 봐서 역자를 다른 분으로 바꾼 것이다. 비록 두 분의 양해를 얻었다고는 하나, 그 두 분께는 물론이고 독자에 대한 도리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저작권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그런 편법이 ‘저작자 사칭죄’에 해당된다는 점을 알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필이면 성서에 관한 책이어서, 하느님께도 죄를 지은 셈이었는데, 핍박받는 자의 호구지책을 너그러이 이해하시어 용서해 주시겠지 하고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자위했다.
이렇게 해가 거듭되는 가운데 나는 출판계 사람들과의 친분도 늘고 그 분야 실상도 알게 되었다. 무직자를 면하기 위한 출판의 현장 체험은 그 후 내가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와 잡지협회 등의 고문변호사가 되어 자문과 상담뿐 아니라 저작권법 교육으로 일조를 하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한국출판학회와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에서 직분을 수행하는데도 매우 유익한 필드(현장) 체험이 되었다.
1982년 3월, 내가 출협의 의뢰를 받고 저작권법 전면 개정안을 작성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저작자와 출판사라는 양면의 경험을 자신의 강점으로 알고 권리자와 이용자 사이의 이익균형을 염두에 두고 시안을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공청회에서는 나를 보는 시각이 나뉘어져 있었다. 가령, 저작재산권 보호기간을 저작자 사망 후 30년간에서 50년으로 늘리는 개정안에 대해서도 교수와 출판인 사이에는 시각차가 컸다. 저작자 처지인 교수들은 내가 몇 해 동안 출판업에 종사하더니 출판계 쪽에 기울었다고 보는 반면, 출판인들은 내 근본이 글 쓰는 사람이니까 결국은 저작자 편이라고 했다. 나의 중립성과 형평성의 담보라 할 산학(産學) 양면의 경험을 각자 자기중심의 일방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을 보고,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중립이란 살아남기가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민사는 양서 출판에는 제법 성과를 올렸으나, 요즘 말로 ‘마케팅’이라 할 영업이 미숙하여 생업으로서는 실패작이 되었다. 그러나 당초엔 예상치 못했던 ‘플러스 알파’가 매우 컸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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