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유신정권에 반대해 추방당한 ‘실업자’들이 하나둘 모여 만든 ‘으악새’ 회원들과 즐기곤 했던 테니스는 제법 큰 위안이었다. 79년 7월 김상현 전 의원(왼쪽부터)와 리영희 교수, 필자와 장을병 교수가 짝을 이뤄 게임을 마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46
험난했던 1970년대의 저녁노을이 스산했다. 갈 길은 여전히 험난하고 날씨는 차가웠다. 먹구름 낀 하늘 아래 빛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변호사 아닌 ‘전직 변호사’로서 불확실성의 연대를 더듬어가며 ‘장외’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핍박받는 사람 변호했다고, 변호인 사퇴 요구를 거부했다고, 징역 살린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변호사 등록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해 버리다니 …. 그래서 이젠 변호인석에 앉지 못하고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봐야 한다. 1976년 3·1절 날 일어난 ‘민주구국선언 사건’(이른바 명동성당 사건), 그리고 79년 5월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 공판 때 나는 그저 방청객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법조계에서는 판검사 같은 공직을 ‘재조’, 민간인 신분인 변호사 사회를 ‘재야’라고 한다. 그렇다면 재야에서마저 추방된 나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황야다. 거친 들판. 외롭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쫓겨난 사람들을 이 바람 부는 벌판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한 시대의 운명적인 동승자라는 느낌을 안고, 서로 마음과 체온을 나누며 무리를 이루어간다.
내 20대의 언젠가 읽었던 조병화의 시집 <인간고도>(1954년)의 첫머리에 이런 ‘시’가 실려 있었다.
“무리를 잃은 사람은 외로움을 안다/ 그러나 그 외로운 사람끼리 또 하나의 무리를 감지할 때/ 그 외로움은 이미 외로움이 아니다.”
그처럼 ‘무리를 떠난 자들끼리 모인 또 하나의 무리’가 바로 ‘으악새’란 모임이었다. 리영희(한양대)·장을병(성균관대)·한완상(서울대) 등 해직 교수, 이상두(언론인), 김상현(전 국회의원), 윤형두(출판인) 그리고 나 한승헌 등 8~9명이 함께 어울렸고, 나중에 김중배(언론인), 임헌영(문학평론가) 등이 참여했다.
우리는 싸구려 밥집이나 선술집에서 주로 만났다. 실업자의 ‘본분’에 벗어나지 않을 만큼 즐거움도 나누었다. 소주 한 잔 들어가면 으레 부르는 노래가 “으악새~”로 시작되는 고복수의 <짝사랑>이었다. 그래서 아예 모임의 이름을 ‘으악새’로 정했다. 함께 야외에도 나가고, 테니스도 치고, 세상 이야기도 나누곤 했다. 어느 해 송년 모임에서는 “이제 우리는 ‘체’에서 벗어나기로 한다”로 시작되는 ‘으악새 선언’(내가 썼다)을 소리 높이 함께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들 저마다의 분야와 직분에서 조금도 허술함이 없이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출판사 일을 하는 외에 <월간중앙>, <대화>, <씨알의 소리>, <기독교 사상>, <경향잡지>, <문학사상>, <주간조선>, <문예중앙>, <한국수필> 등 여러 지면에 글을 썼다. 반공법으로 재판을 받고 나왔는데도 여기저기서 원고 청탁을 하는 것을 보면, 나를 (판결문처럼) ‘북괴 동조자’로 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고행 중에도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운동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79년 3월에는 범민주 진영의 연대투쟁 기구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공동대표 윤보선·함석헌·김대중)이 발족되었는데, 나는 거기서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어 5월에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의 전무이사로 선출됐다. ‘전무이사’라는 직명이 무슨 영리회사 같은 느낌을 주어서 이상한데, 실은 한국앰네스티의 조직과 운영의 총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당시 유신독재와의 오랜 싸움에 야당은 물론이고 재야 민주화 세력도 매우 지쳐 있을 때여서, 한국앰네스티가 마치 재야민주 세력의 중심마당처럼 되었다. 이런 현상은 반갑고도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조직이나 행사나 참여도에서 활기가 넘치고, 범야의 구심점이 되는 것은 보람 있는 변화였지만, 앰네스티의 ‘자국문제 개입금지’ 원칙에 비추어 얼마쯤 논란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한국앰네스티의 이사, 사무국장, 지부장, 핵심 회원들이 시국사건으로 구속되는 사태에 직면하여, 런던의 국제앰네스티 본부와의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78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반헌법적 집회에서 또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씨가 연달아 최고 권좌에 오르면서 국민들의 반발은 한층 더 높아졌고 반사적으로 탄압 또한 격심해지고 있던 국면이었다. 그로부터 열 달 뒤,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10·26 사태’가 터진다. 그 후 계엄통치 아래서 유신 철폐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집회가 전국에서 열렸는데, 그해 11월 24일 명동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강당에서 열린 결혼식 위장 집회를 빌미로 많은 민주인사와 시민들이 계엄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변호사
고행 중에도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운동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79년 3월에는 범민주 진영의 연대투쟁 기구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공동대표 윤보선·함석헌·김대중)이 발족되었는데, 나는 거기서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어 5월에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의 전무이사로 선출됐다. ‘전무이사’라는 직명이 무슨 영리회사 같은 느낌을 주어서 이상한데, 실은 한국앰네스티의 조직과 운영의 총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당시 유신독재와의 오랜 싸움에 야당은 물론이고 재야 민주화 세력도 매우 지쳐 있을 때여서, 한국앰네스티가 마치 재야민주 세력의 중심마당처럼 되었다. 이런 현상은 반갑고도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조직이나 행사나 참여도에서 활기가 넘치고, 범야의 구심점이 되는 것은 보람 있는 변화였지만, 앰네스티의 ‘자국문제 개입금지’ 원칙에 비추어 얼마쯤 논란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한국앰네스티의 이사, 사무국장, 지부장, 핵심 회원들이 시국사건으로 구속되는 사태에 직면하여, 런던의 국제앰네스티 본부와의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78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반헌법적 집회에서 또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씨가 연달아 최고 권좌에 오르면서 국민들의 반발은 한층 더 높아졌고 반사적으로 탄압 또한 격심해지고 있던 국면이었다. 그로부터 열 달 뒤,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10·26 사태’가 터진다. 그 후 계엄통치 아래서 유신 철폐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집회가 전국에서 열렸는데, 그해 11월 24일 명동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강당에서 열린 결혼식 위장 집회를 빌미로 많은 민주인사와 시민들이 계엄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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