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8월 열린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비상군법회의 법정. 피고인석 앞줄 오른쪽부터 김대중 선생,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세번째줄 오른쪽에 필자의 얼굴이 보인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48
불 낸 놈이 ‘불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나라에는 정부를 전복하고 국권을 탈취한 자들이 툭하면 정부 전복 기도니, 내란음모니 하며 반대세력을 때려잡는 풍조가 있다. 19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도 그런 사례의 하나였다. 여기에는 억지 조작의 ‘감초’로 고문·날조가 필수과목처럼 돼 있는데, 그런 만행이 주는 분노와 두려움의 한복판에 우리가 서 있었다.
나처럼 허약한 사람에게도 그런 수순은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주먹질, 발길질, 침대봉 세례, 무릎 안쪽에 각목 끼워넣고 짓누르기, 그리고 …. 점잖게 명사로만 나열해도 이렇다. 여기에 동사·형용사·부사까지 등장하면,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치욕스러워진다. 그런 일진광풍 속에서 그들은 조서라는 것을 꾸몄다. 왜 ‘조서를 꾸민다’는 말이 생겼는지, 절실히 알게 되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혹은 “묵묵부답이었다”라는 말이 구차한 설전과 타협의 흔적으로 조서에 끼어들기도 하였다.
그 사건은 한마디로 ‘김대중 죽이기’를 위한 연출이었다. 내란음모죄만으로는 사형 선고를 할 수 없으니까, 사형이 가능한 국가보안법 조항(반국가단체 수괴)까지 갖다 붙인 데서도(일본에 있는 ‘한민통’을 문제 삼았음) 그 본색이 드러나 있다.
구속영장도 없고, 가족 면회도 없이, 고문의 비명 소리와 그에 못지않게 불안을 주는 죽음 같은 정적이 뒤섞이는 가운데 밤도 없고 낮도 없는 생지옥의 나날이 쌓여갔다. 요란했지만 어설프게 얽어놓은 사건이 계엄사 검찰부로 넘어가는 날, 우리는 그 저주의 지하공간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 이틀 모자라는 두 달 만이었다. 그때 그 순간의 ‘감격’을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지하실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와 지상으로 나온 순간, 외계의 햇볕과 7월의 하늘이 내 시야를 걷잡을 수 없이 흔들어 놓았다. 지금 내가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깜빡 잊은 채, 우선 하늘을 쳐다보게 된 것만이 그렇게 반가웠다. M16 소총을 든 헌병과 어느새 내 손에 채워진 수갑을 의식한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서울구치소는 나에게는 ‘재수’였다. 재수없이 또 걸려든 ‘재수’, 그런데 이번은 전에 없던 ‘곱징역’이었다. 교도관들을 못 믿어서인지 헌병들까지 들어와서 이중의 감시·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입소하는 날, 나를 데리고 감방으로 가던 교도관이 “개×× 같은 세상 만나서 고생 좀 하시게 되었습니다”라고 위로인지 연민인지 모를 말을 했는데, 그의 ‘개×× 같은 세상’이라는 상말이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군 검찰부의 조사라는 것도 이미 주어진 숙제를 하듯이 ‘각본’에 따른 작업을 할 뿐이었다. 공소장이 송달되었다. 24명이나 되는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이 장황해서 공소장은 무척 두꺼웠다.
육군교도소로 넘어간 김대중·문익환·이문영·예춘호·고은태(고은)·김상현·이신범·조성우·이해찬·이석표·송기원·설훈·심재철 등은 ‘내란음모 그룹’이고, 나머지 즉 서남동·김종완·이해동·김윤식·한완상·유인호·송건호·이호철·이택돈·김녹영, 그리고 나처럼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말하자면 ‘계엄법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나에 대한 공소사실은 “김대중의 연설문 검토 및 작성에 참여하고, 거액의 자금 지원을 받아 그의 연설문 등을 모은 책자를 출판하고, 동인을 주축으로 하는 재야 정치세력과 부단한 회합을 가지며, 동인의 집권을 위한 민주제도연구소에 참여하고, 범국민적인 반정부 투쟁 방안을 논의하여 왔다”는 것이었다. 과장은 되었지만 기본 사실은 틀리지 않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차피 조연급으로 ‘스카우트’된 나야 공소사실이든 판결이든 뭐 그리 중요할까마는, 문제는 김대중 선생이었다. 광주의 정동년에게 민중봉기 자금으로 500만원을 주었다던가, 5월 12일 북악파크호텔에서 내란을 음모하였다던가, 한민통의 의장이 되어 반국가단체의 수괴가 되었다는 따위의 혐의는 모두 서툰 날조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무죄의 증거’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 해 8월 14일 오전, 이 사건에 대한 계엄보통군법회의 첫 공판이 삼각지의 군 법정에서 열렸다. 그날은 하루종일 공소장 낭독만 하다가 끝났다. 디제이에 대한 공소장 낭독에만 1시간27분이 걸렸다고 신문이 보도했다. 거의 모든 피고인들이 공소사실 중 특히 내란음모 사실(디제이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도)을 부인했는데, 한두 사람이 얼마쯤 이상한 진술을 했다. 나도 공소사실에 대해 한마디했다.
한승헌 변호사
나에 대한 공소사실은 “김대중의 연설문 검토 및 작성에 참여하고, 거액의 자금 지원을 받아 그의 연설문 등을 모은 책자를 출판하고, 동인을 주축으로 하는 재야 정치세력과 부단한 회합을 가지며, 동인의 집권을 위한 민주제도연구소에 참여하고, 범국민적인 반정부 투쟁 방안을 논의하여 왔다”는 것이었다. 과장은 되었지만 기본 사실은 틀리지 않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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