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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변호인도 쫓아내는 ‘각본대로 재판극’ / 한승헌

등록 2009-03-15 18:04수정 2009-03-15 19:56

필자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된 지 58일 만인 80년 7월 14일 가족에게 전달된 구속 통지서. 그때까지 행방도 생사도 모른 채 극도의 불안에 빠져 있던 가족들은 이 통지서를 받고서 오히려 안도했다고 한다.
필자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된 지 58일 만인 80년 7월 14일 가족에게 전달된 구속 통지서. 그때까지 행방도 생사도 모른 채 극도의 불안에 빠져 있던 가족들은 이 통지서를 받고서 오히려 안도했다고 한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49
본시 재판은 사실 인정과 법률 적용을 통하여 유무죄를 가리고, 유죄일 때에는 형벌을 정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사전에 유죄판결과 형벌이 정해진 재판극에서는 굳이 사실 규명이나 법률 논쟁을 할 실익이 없게 된다. 1980년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바로 그런 예였다. 법정에서 아무리 진실 싸움을 벌여도 판결에 반영될 여지가 없고, 그렇다고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는다. 이래저래 분노와 냉소가 겹치다 보니, 사실 문제만 가지고 구차한 반박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나는 공소장 ‘모두(冒頭)사실’의 한 대목을 문제 삼고 나섰다.

“공소장에, 피고인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면 자신도 틀림없이 출세할 것으로 확신하고 운운하였는데, 이것은 인격 모독이다.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면 어떻게 되는가는 바로 이 법정이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또 ‘출세 확신’ 운운하는데, 나는 변호사가 된 것만으로도 출세했다고 생각한다. 판결에서는 공소장의 이 대목만이라도 삭제해주기 바란다.”

그런데 공소장의 제목만 바꾼 ‘판결문’을 받아보고 나는 놀랐다. 앞서 내가 문제 삼은 그 대목이 판결문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나의 그 한마디로 이렇게 시원한 ‘성과’를 거두다니, 나는 오히려 의아스러웠다.

(그 후 세월이 흘러, 98년 3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할 때, 나는 감사원장으로 지명되었다. 이것을 군법회의 공소장대로 ‘출세’라고 본다면, 그때의 공소장은 ‘예언적 공소장’이 되고, 내 요구대로 한 대목을 빼버린 그 판결은 오판을 한 셈인가?)

계엄당국은 우리 ‘피고인’들의 사선 변호인 선임을 철저히 봉쇄하다가 막판에 일방적으로 지명한 국선변호인을 법정에 들여보냈다. 그러다 보니 피고인과 변호인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고 고함이 오가는 진풍경이 잇따랐다. 그런 중에도 소종팔 변호사만은 달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란사건이라고 하는데, 피고들은 각목이나 화염병은커녕 부지깽이와 박카스병 하나 가지고 다녔다는 증거는 물론, 사실 기록도 기소장에 없다. 도대체 뭘 들고 내란을 했다는 말이냐?” 이렇게 들이댄 소 변호사는 재판 도중에 쫓겨나가서 다시는 법정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문영 교수가 자기 옆방에 갇혀 있던 이해동 목사와 내가 고문당한 사실을 폭로·규탄하는 바람에 나는 진땀이 났다.(지하 2층 조사실의 벽 사이가 얇고 낡은 탓인지 옆방의 말소리와 음향이 들렸던 것이다.) 방청석의 가족들이 얼마나 놀라고 가슴 아파 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중정에서는 일부 젊은 피고인들에게 “데모를 김대중이가 시켜서 했다고 한마디만 하면 당신들은 풀어주겠다. 그러나 만일 불응한다면…” 하는 식으로 협박과 회유를 했다는 말도 들었다.

재판 진행에 불만이 쌓인 나머지 법정 소란이 계속되자 문익환 목사가 일어났다. “우리는 이런 재판 받을 수 없소. 재판부 기피 신청을 하겠소.” 그 말에 이어 김대중 선생을 비롯한 피고인 전원이 법정에서 퇴정해 버렸다. 그런 살벌한 재판극의 와중에서도 피고인 쪽 증인으로 나온 이태영 여사가 김대중 선생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진실을 담은 용감한 증언을 해주어서 모두를 숙연케 했다.

억지 연출에 따른 우여곡절 끝에 9월11일 검찰관의 논고와 구형이 있었다. 검찰관은 미리 작성된 논고문을 장황하게 읽은 뒤, 피고인들에 대한 구형에 들어갔다.

“피고인 김대중을 사형에, 문익환·이문영·고은태·조성우를 징역 20년에…”로 시작하여 징역 15년, 10년, 7년, 4년 6월, 4년, 3년 등으로 등급(?)을 매겨 구형을 했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9월12일 시작된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은 무슨 계산에서인지 공소장 표시 순서의 역순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두 번 크게 놀랐다. 첫번째가 6·25 때 인민군의 대포 소리에 놀랐고, 두번째로 이번 김대중 선생에 대한 사형 구형에 놀랐다”로 시작되는, 진실과 야유가 뒤섞인 말을 남겼다. 김대중 선생의 최후진술은 그 다음날에 있었다. 그는 “당국이 나에 대한 형을 집행하려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으나, 이것이 과연 법의 정의에 합당하며 민주국가로서 옳은 일인지 심사숙고해 주기 바란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다”라는 말을 포함하여 거의 두 시간에 걸쳐 숙연한 최후진술을 했다.

마치 유언처럼 비장하고 절절한 그분의 진술은 매우 감동적이어서, 피고인석과 방청석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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