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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준법 서약서’ 그것은 큰 유혹이었다 / 한승헌

등록 2009-03-16 18:34수정 2009-03-16 22:21

1981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뒤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해 9월 독방에서 머리를 깎인 채 독서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요구로 교도소 쪽이 찍었으며, 법무부가 보관해 오다 2000년 12월 김 대통령에게 전달해 공개된 것이다.
1981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뒤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해 9월 독방에서 머리를 깎인 채 독서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요구로 교도소 쪽이 찍었으며, 법무부가 보관해 오다 2000년 12월 김 대통령에게 전달해 공개된 것이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50




1980년 9월17일 오전, 삼각지의 보통군법회의에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판결 선고가 있었다. “피고인 김대중을 사형에 ….” ‘혹시나’는 어디 가고 ‘역시나’만 가득했다. 판결문을 읽는 재판장 문용식 소장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아니, 흔들렸다. 문익환·이문영 20년에 이어서 15~2년씩의 실형이 떨어졌다. 나는 김종완·이해동 두 분과 같이 징역 4년이었다. 연작 시리즈 각본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모두 항소는 했다.

그해 10월24일 오전, 항소심(고등군법회의·재판장 육군중장 류근환) 첫 재판이 열렸다. 초반부터 문답 과정에서 덧나기 시작한 단상단하의 감정은 닷새 뒤 29일의 5회 재판에서 마침내 격돌을 하고 말았다. 자수 간첩이라는 윤효동이 검찰 쪽 증인으로 나와 일본의 ‘한민통’ 간부를 자기가 포섭했다며, 당시는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니, ‘남조선’이니, ‘북조선’의 아무개 ‘동지’ ‘동무’ 하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황당하게 늘어놓았다. 듣다 못한 김상현 전 의원이 일어나 소리를 쳤고, 이어서 문익환 목사가 “저놈을 법정 구속하라”고 일갈하자 심판부는 윤효동을 검찰관 출입구 쪽으로 허겁지겁 퇴장시켰다. 휴정 후 속개된 법정에서도 증인 채택 문제로 또 소란이 벌어져 피고인들이 퇴장하자 다시 휴정이 되곤 했다. 이런 과정에서, 법정 안에 들어와 쪽지 전달 방식으로 재판을 지휘(?)하던 기관원이 다급했던지 직접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피고인들을 퇴정시키도록 훈수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그 뒤에도 항의, 퇴장, 애국가 봉창, 단식 등 다양한(?) 사연들이 이어진 끝에 11월3일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김대중 선생에 대한 사형은 그대로였고, 몇 사람은 형량이 줄거나 집행유예로 풀려나갔다.(다음날 형집행 면제를 받은 네 사람이 추가로 석방되었다.)

항소심 선고를 받고 서울구치소로 돌아온 우리는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호송차에 실려 남한산성 밑에 있는 육군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일주일 뒤에 두 분이 또 석방되었는데, 먼저 나가게 되어 미안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군 교도소라는 말에서 느낀 그대로 거기 감방은 완전한 밀폐공간이었다. 복도 쪽으로 난 두부모만한 네모진 시찰구도 가리개에 가려 있었다. 그래도, 전부터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분들과 함께 지내게 된 것이 좋았고, 접견과 소내 생활에 융통성을 쟁취(!)해 가면서 그런대로 화제와 추억에 남을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해가 바뀌어 81년이 되었다. 1월23일 대법원에서 김대중 선생의 사형이 확정되고, 그날로 정부는 무기징역으로 감일등하는 조처를 내렸다.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우리는 언제 김대중 선생의 사형이 확정되어 끌려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통로 입구 가까운 방에 있는 내가 밤에 불침번을 서기로 하고, 만일의 사태 때 크게 소리를 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일어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육군교도소에서 근무하는 헌병들은 장교·사병 할 것 없이 우리들을 무난하게 응대해주어서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보다는 격리감이나 속박감이 덜했다. 매주 한 번씩 점심으로 주는 라면 맛이 그렇게 좋았는가 하면, 한날한시에 함께 목욕도 할 수가 있어서 ‘욕조 정담’도 즐거웠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그런데 어느 날 ‘사건’이 찾아왔다. 밖으로 불려 나갔더니, 안기부(종전의 중앙정보부)에서 왔다는 두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더러 얼마나 고생이 되느냐고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꺼내놓은 용건은 각서 한 장만 쓰면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뭣을 잘못했다고 안 해도 좋으니, 앞으로 나가서 법을 잘 지키고 살겠다고만 한 줄 쓰면 된다고 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과 계산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잠시 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난 그런 거 쓰지 않고도 법을 잘 지켜 왔는데 …”였다. 몸도 허약하고 노모님도 계시지 않느냐,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특히 병환 중이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과연 무엇이 자식의 도리일까 하는 고뇌도 외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가혹한 중형을 받은 ‘감방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지만, 쓰지는 못하겠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들은 참 딱도 하다는 표정으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바로 그 다음날엔 고등학교 동문 법조인 두 사람이 찾아왔다. “네 명예와 자존심만 생각하다가는 큰 불효가 될 수 있다”는 설득에 공감하면서도 역시 각서 쓰기는 거부하기로 했다. 나와 형량이 같은 김종완·이해동 두 분도 똑같은 각서 유혹을 이겨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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