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여름 무크지 <민중교육>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김진경, 윤재철, 송기원씨가 1986년 2월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오른쪽 변호인석에 한승헌, 김동현, 홍성우 변호사(왼쪽부터)가 앉아 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59
1985년 8월12일 저녁, 작가 송기원씨는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즐긴 휴가 나들이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는데, 난데없이 젊은이 3명이 들이닥쳤다. ‘좀 가줘야겠다’는 그들과 ‘오늘은 못 가겠으니 내일 오라’는 등 설전을 벌이던 끝에 송씨는 부인에게 소리쳤다. “여보, 부엌에서 칼 좀 가져와. 이놈들, 불법으로 주거침입한 강도들이야”라며 맞섰지만, 그들이 경찰 아닌 안기부 직원인 줄 알고서는 “아이고 인자 나는 죽었구나” 싶어 연행에 응했다. 송기원씨다운 무용담 한 토막이자 작가다운 맨살의 표현이다.
무크지(부정기간행물) <민중교육> 1985년 8월호에 실린 현직 교사 두 사람의 글이 용공 혐의로 사건화되었다. 필자인 김진경(서울 양정고 교사) 윤재철(서울 성동고 교사) 두 시인 외에 그 잡지 주간인 송기원씨도 그렇게 ‘남산’에 연행되어 세 사람 모두 호된 조사를 받고 검찰에 구속·송치되었다.
그에 앞서 당시 문교부(지금의 교육과학부)는 <민중교육>이 반미를 선동하고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용공·불온 출판물에 해당한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한 바 있었다.
검찰도 이에 발맞추듯이, 김진경씨의 ‘해방 후 지배집단의 성격과 학교교육’이라는 글과 윤재철씨의 ‘교육 현장, 그 민주적 해방’이란 글 외에도 ‘분단상황과 교육의 비인간화’라는 제목의 좌담기사가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선전·선동활동에 동조하는 내용이라면서 전원 구속 기소를 했던 것이다.
검찰에서부터 법정까지 세 피고인들의 일관된 주장은, 문제의 글들이 ‘분단 극복과 교육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쓴 글’이라는 요지였다.
하지만, 피차의 시각 차는 엄청났다. 공소장은 필자 두 사람이 가정형편이 어려워 현실에 대한 불만이 컸다는 식으로, 가난해서 용공이 되었다는 그릇된 공안적 도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록 형사 피고인 신세는 면했다 하더라도, <민중교육>에 글이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전국의 많은 교사들이 해직되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었다.
재판이 열리자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은 만만치 않았다.
검사가 물었다. “피고인은 북한공산집단이 대남적화통일을 목표로 하는 반국가단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국가보안법 사건의 공소장이나 판결문에 거의 부동문자처럼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피고인도 관용화(慣用化)된 이 대목에서는 “예”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송기원씨는 달랐다. (송)“모릅니다.” (검사)“아아니, 북괴의 대남 적화전략도 모른단 말이오?” (송)“북한 신문을 볼 수도 없고, 방송도 못 듣게 하는데, 어떻게 북한의 대남전략을 안단 말입니까?” (검)“구체적인 것까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대략적인 것은 알고 있을 것 아니오?” (송, 검사의 집요한 질문에 귀찮다는 듯이)“대략적인 것은 좀 압니다.” (검)“조금 전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더니, 대략적인 대남전략은 어떻게 알게 되었지요?“ (송, 잠시 머뭇거리다가)”예비군 훈련 가서 들었습니다.“(방청석 폭소) 이런 법정 태도 때문이었을까? 피고인들에게는 징역 1년에서 1년 6월까지의 실형이 선고되었다.(1986년 2월13일) 다만 판결문에는 ‘가난하니까 용공이 되기 쉽다’는 투의 대목(공소장 표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북괴의 선전·선동활동에 동조’ 또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표현물을 제작‘했다는 검찰의 주장은 ‘무수정 통과’로 나왔다. 항소심 판결(1986년 6월13일)은 김진경 징역 1년, 윤재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송기원 징역 10월로 나왔다. 대법원 또한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추인하고, ‘판시 피고인들의 발언이나 글이 단지 우리나라의 현행 교육제도에 관한 모순점을 지적한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계층 간의 알력과 불화를 조장하며 운운’ 하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상고를 기각했다.(1986년 9월 23일)
이 사건은 이돈명, 홍성우, 김동현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변호사가 변호에 나섰다.
윤재철씨가 쓴 회고담에, 나와의 ‘맞선’을 본 뒤의 인상기가 재미있다. 변호인 접견실에서 처음 나하고 만났을 때 내 인상에 대해(내가 ‘남이 아니라 한 식구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 다음)“꼭 시골에서 김매다 지금 막 올라오신 삼촌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쓰여 있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쓴 표현이었다.
피고인석에 섰던 세 젊은이의 ‘교육 민주화의 염원’이 끝내 ‘반미 용공’으로 판정난 것은 5공 치하에서 이 나라 사법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단면이라고 하겠다.
한승헌 변호사
검사가 물었다. “피고인은 북한공산집단이 대남적화통일을 목표로 하는 반국가단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국가보안법 사건의 공소장이나 판결문에 거의 부동문자처럼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피고인도 관용화(慣用化)된 이 대목에서는 “예”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송기원씨는 달랐다. (송)“모릅니다.” (검사)“아아니, 북괴의 대남 적화전략도 모른단 말이오?” (송)“북한 신문을 볼 수도 없고, 방송도 못 듣게 하는데, 어떻게 북한의 대남전략을 안단 말입니까?” (검)“구체적인 것까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대략적인 것은 알고 있을 것 아니오?” (송, 검사의 집요한 질문에 귀찮다는 듯이)“대략적인 것은 좀 압니다.” (검)“조금 전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더니, 대략적인 대남전략은 어떻게 알게 되었지요?“ (송, 잠시 머뭇거리다가)”예비군 훈련 가서 들었습니다.“(방청석 폭소) 이런 법정 태도 때문이었을까? 피고인들에게는 징역 1년에서 1년 6월까지의 실형이 선고되었다.(1986년 2월13일) 다만 판결문에는 ‘가난하니까 용공이 되기 쉽다’는 투의 대목(공소장 표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북괴의 선전·선동활동에 동조’ 또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표현물을 제작‘했다는 검찰의 주장은 ‘무수정 통과’로 나왔다. 항소심 판결(1986년 6월13일)은 김진경 징역 1년, 윤재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송기원 징역 10월로 나왔다. 대법원 또한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추인하고, ‘판시 피고인들의 발언이나 글이 단지 우리나라의 현행 교육제도에 관한 모순점을 지적한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계층 간의 알력과 불화를 조장하며 운운’ 하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상고를 기각했다.(1986년 9월 23일)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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