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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보도지침’ 언론 유린에 맞선 삼총사 / 한승헌

등록 2009-03-31 18:58수정 2009-03-31 21:42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으로 구속됐던 세 언론인이 1989년 12월 5공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하고 잇다. 왼쪽부터 김태홍 당시 한겨레신문 이사, 신홍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주언 <서울경제신문> 기자.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으로 구속됐던 세 언론인이 1989년 12월 5공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하고 잇다. 왼쪽부터 김태홍 당시 한겨레신문 이사, 신홍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주언 <서울경제신문> 기자.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61
‘보도지침’이라고 하면 기업이나 단체의 업무홍보 요령쯤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보도지침’이란 정부기관이 전국 각 언론사에 매일 시달한 보도통제의 구체적 지시사항을 말한다.

보도지침은 전두환 정권이 고안한 전대미문의 언론 말살 흉기였다.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에서는 1985년 가을 무렵부터 각 언론사 보도국이나 편집국에 기사 작성과 보도에 관한 세밀한 지침을 시달했다. 지난번에 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예로 들자면 이러하다. “기사를 사회면에 싣되, 기자들의 독자적인 취재 내용은 싣지 말고, 검찰이 보도한 내용만 보도하며,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표현할 것.” 지침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렇게 계속된다. “공안당국이 배포한 분석자료 중 ‘사건의 성격’ 부분에서 제목(‘혁명 위해 성까지 도구화’)을 뽑아주고, 검찰 발표 내용은 반드시 전문을 그대로 싣되,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진영의 고소장(변호인단의 고발장) 내용이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여성단체 등의 사건 관련 성명은 일절 보도하지 말 것.”

이쯤 되면 무슨 원격·간접 조종이 아니라 아예 현장을 직접 지배하는 작전명령이었다. 그런데도 어느 언론사나 언론인도 이에 항의하거나 폭로하지 못하고 따라만 갔으니, 권력에 대한 규탄 못지않게 언론 내부의 침묵과 순응에도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이런 수치스러운 언론 풍토의 지각(地殼)을 깨고 정부 보도지침을 세상에 폭로한 용감한 언론인이 있었으니,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 김태홍 공동대표(한국기자협회 회장 역임), 신홍범 실행위원(<조선일보> 해직기자, 두레출판사 대표)이 그들이었다. 이 세 분의 결단에 따라 1986년 9월 민언협 기관지 <말>은 85년 10월부터 86년 8월까지 약 10개월분의 정부 보도지침을 날짜별로 정리·수록하여 발행함으로써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그쯤 되면 마땅히 사죄를 해야 할 정부는 오히려 위 세 사람을 구속하는 적반하장의 사태를 조성했다. 죄명도 기상천외해서 국가보안법·집시법 위반에다 외교상 기밀 누설죄와 국가모독죄까지 갖다 붙였다.

검찰은 그런 문건이 보도지침이 아니라 보도 협조 요청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보도의 ‘가’, ‘불가’, ‘절대불가’라는 지시 외에 ‘1단으로 쓸 것’ ‘1면 톱으로 쓸 것’ ‘사진 쓰지 말 것’ 등 구체적 명령까지 나와 있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김대중씨에 대한 기사에서 사진을 쓰지 말 것’이란 대목을 놓고 법정에서 내가 한마디 했다. “김대중씨의 얼굴도 국가기밀인가?”

1심 재판 때 변호인단(조준희 변호사 등 10명)에서는 문공부 관계자와 언론사 간부 등 24명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재판부(단독 판사)는 놀랍게도 우리가 신청한 증인 전원을 채택한다는 결정을 해서 오히려 우리가 놀랐다. 그러나 그다음 기일에 판사는 그 전에 한 증인 채택을 모두 취소한다고 하여 또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무엇이 판사로 하여금 그런 급선회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 심상치가 않았다.


결심 공판이 있는 날, 나는 개정 시간이 임박해서야 장문의 변론서를 겨우 완성해 가지고 허겁지겁 법정으로 뛰어갔다. 그 낭독에 40분쯤 걸렸다. 피고인석의 세 사람은 의연하고 감동적인 최후진술을 했다. 그러나 87년 6월 3일 선고된 1심 판결은 ‘전원 유죄’였다.(김태홍 징역 10월·2년간 집행유예, 김주언 징역 8월·1년간 집행유예, 신홍범 형의 선고유예)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항소심은 공판도 열지 않은 채 세월을 보내다가 94년 7월 5일 피고인 세 사람에게 모두 무죄판결을 내렸다. 두 차례나 정권이 바뀌어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의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 언론에서는 ‘8년 만의 무죄’를 시대상의 변화와 연관지어 논평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 국가모독죄와 옥내집회 처벌 조항은 폐지되었다. 이적표현물 소지와 외교상 기밀 누설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 무죄판결은 검사의 상고로 1년 반이 지난 95년 12월 5일에야 상고 기각으로 확정이 되었다. 사건화된 지 석달 모자라는 10년 만의 종결이었다.

이 나라 언론을 무참하게 짓밟던 권력의 마수를 용기 있게 고발하고, 그로 해서 고난을 당한 세 분의 참언론인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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