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10일 중구 정동 성공회 서울대성당 앞마당에서 ‘6월 민주항쟁 선포식’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지도부가 만세를 부르고 있다. 앞에 선 뒷모습이 계훈제 당시 민통련 부의장, 앞줄 왼쪽부터 김병오 의원, 지선 스님, 양순직 의원, 김명륜 의원, 박형규 목사, 송석찬 의원 등이 보인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62
국제앰네스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1980년대의 한국은 ‘고문이 국가정책의 일부가 되어버린’ 나라였다. 86년 1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사건도 그 증명이었다. ‘쇼크사’라는 경찰의 거짓말은 박군의 부검을 맡았던 한 의사의 용감하고 정직한 발언으로 들통이 났고, 국민들의 더욱 큰 분노를 샀다. 거기에다 전두환은 국민 각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끝내 거부한 채(4·13 호헌 조치) 노태우에게 정권을 넘겨주려고 했다. 이렇게 거듭된 불의는 국민들의 집단 저항을 불러들였고, 마침내 역사적인 ‘6월 민주항쟁’의 불길로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그해 5월 27일 발족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있었다. 국본에는 그때까지 반정부 운동이나 거리시위 등에 나서지 않았던 직능단체와 시민들도 가세했다. 국본은 중앙에 상임 공동대표와 상임 집행위원(상집)을 두고, 지역마다 자발적으로 생긴 지부가 있었다. 법조계에서는 86년 5월에 발족한 정법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74명의 변호사들이 국본에 참여했다. 내가 상임 공동대표를 맡고, 고영구 변호사가 공동대표, 이상수·김상철·박용일 세 변호사가 상집을 맡았다.
전두환이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명한 6월 10일을 기해 국본이 이끄는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에서 열려, 거리시위가 동시다발로 전개되었다. 우리 변호사들은 그날 결행의 시각 오후 6시를 30분쯤 앞두고 세종로 변호사회관에 모였다. 상임 공동대표인 내가 시위 항쟁 참여의 변(辯)을 하고, 무리지어 거리로 나섰다. 광화문 지하도를 건너 조선일보사 앞을 지날 때는 경찰이 길을 열어주기까지 해서 오히려 이상했다.(멀쩡한 넥타이 신사의 무리여서 경찰이 정부 공직자들로 착각?) 하지만 우리가 목적지인 성공회(국본의 대회 선포식 예정 장소) 입구에 접근하자, 취재기자들이 알아보고 사진을 찍는 등 술렁이는 바람에 곧 경찰의 저지를 받았다. 바로 그 순간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하기식(매일 오후 6시 국기게양대에서 태극기 내리는 행사)이 시작되었다. 주변의 시민과 전투경찰들이 함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연주가 끝나자마자 경찰관들은 우리를 밀어내기 시작했고, 할 수 없이 밀려나서 변호사회관으로 돌아와 각자 승용차를 타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 행진에 참여했다. 그리고 다시 변호사회관으로 돌아와 밤샘농성을 했다. 그날 오후 6시를 기하여 차량의 경적과 거리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를 강타했고, 진압경찰과 시위군중 사이에 최루탄 발사와 투석전으로 격돌이 벌어졌으며, 많은 연행자와 부상자가 나왔다. 이 나라 법조 사상, 변호사들이 거리투쟁에 나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6월 26일에는 ‘민주헌법 쟁취 평화대행진’이 열렸고, 이날도 변호사들은 집단적으로 거리시위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광화문에서 종로 쪽으로 행진을 했는데, 맞은편에서 머리에 흰 바가지를 쓴 백골단이 우리를 향해서 오고 있지 않은가. 나는 상임대표라는 직함 때문에 부득이(?) 맨 앞장을 서지 않을 수 없었는데, 다행히도(?) 험악한 충돌은 발생하지 않고 해산을 당했다.
전국적 민주항쟁의 위력에 밀린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를 통해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하고, 그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정치인의 사면 복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실시된 대통령 직선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의 실패로 노태우정권이 출현했다. 이런 분열의 업보는 많은 국민들에게 큰 실망과 회한을 안겨주었다.
6월 항쟁이 고비를 넘긴 뒤,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평가모임을 겸한 예배에서 나는 말했다. “이번 6월 항쟁이 얼마쯤 성과를 거둔 것은 종전엔 데모세력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참여하여, 그야말로 범국민적 저항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치과의사들이 맨 먼저 참여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이를 갈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6월 항쟁은 이 나라에서 군사독재의 기를 꺾고 민주정치·민주사회로 제 길을 잡아 나가는 갈림길이 되었다. ‘그 위대한 항쟁에 함께 나섰던 범민주세력과 수많은 거리의 시민들이 20여년 전 그날의 분노와 의지를 오늘에 되살릴 수 있다면….’ 왜 이다지도 아쉬움과 개탄이 절실하게 밀려드는가?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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