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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열화같은 국민모금, 새희망 연 새신문 / 한승헌

등록 2009-04-05 18:01수정 2009-04-05 20:38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을 맡은 필자가 1989년 5월 15일 창간 1돌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뒤쪽에 송건호 사장이 앉아 있고, 오른쪽 책상 위로 유공사원들에게 줄 공로패·감사패가 보인다.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을 맡은 필자가 1989년 5월 15일 창간 1돌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뒤쪽에 송건호 사장이 앉아 있고, 오른쪽 책상 위로 유공사원들에게 줄 공로패·감사패가 보인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64
한겨레신문 20년의 역사를 정리해서 담은 <희망으로 가는 길>(2008년 5월 한겨레신문사)을 보면, 창간 전후의 험난하면서도 감동적인 사연들과 안팎의 진통에 관해서 매우 진솔하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단아한 양장본으로 꾸며진 그 간행물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나는 초대 창간위원장, 자문위원 겸 경영자 추천위원, 그리고 ‘한겨레 논단’의 고정 필진 등으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직함과는 달리 나는 한겨레 창간의 주역도 아니었고, 중심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비유컨대, 나는 그라운드의 선수가 아니라 응원단 앞에서 큰 깃발을 좌우로 흔들며 열기를 돋우고 분위기를 잡아 나가는 ‘치어맨’(?) 노릇을 한 정도였다. 그리고 국민주 모집 때 ‘바람’을 잡고, 나 자신도 소액주주의 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었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을 치른 뒤, 사회 각계에선 민주화를 향한 변혁의 기운이 넘쳐났다. 전교조, 훗날 민주노총의 모체가 되는 전노협, 경실련,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연합 등이 바로 이런 전환기에서 출범했다.

이때 역사적인 민주화의 흐름을 선도해 나갈 새로운 언론매체로 탄생한 것이 바로 한겨레신문이었다. 군사정권에 협력한 보수 언론과는 달리 진정으로 국민의 뜻을 받들고 대변할 신문이 필요하다는 데는 많은 사람이 공감했지만, 그 실현은 난감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5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쫓겨났거나 80년 전두환 군부에 의해서 추방된 해직기자들이 뜻을 같이하고 나섰다. 그들은 6월항쟁의 여진이 채 식기도 전인 87년 9월부터 새 신문 창간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열화 같은 국민 각계의 모금 참여로 세계에 유례가 없는 국민주주 운동에 성공하여, 6만 주주와 더불어 기적 같은 신문사 창사에 성공한다. 88년 5월 15일치 창간호를 대하는 감격은 양평동 사옥(공장 건물을 개조)의 윤전기 앞에서 환호하던 그들만의 보람이 아니었다.

나 역시 감격했다. 그러면서도 불안했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과 앞으로의 자금난이 뇌리에 어른거렸다. 광고(수입)가 걱정이었다. 군사정권 아래서 어느 기업이 광고를 줄 것인가. 그래서 나는 한겨레를 펼치면 ‘상반신’보다 ‘하반신’을 먼저 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반신이 광고로 채워졌는지, 제대로 돈이 들어온(올) 광고인지, 아니면 ‘공짜 광고’(속어로 뎃뽀)인지, 혹은 서비스 광고인지를 나대로 점쳐 보는 것이었다. 기사가 하반신까지 밀고 내려와 있으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시절, 여성으로서 창간 초기 광고부에서 뛰었던 황윤미 부장(동아투위 해직기자 출신)이 생각난다. 그는 가끔 내 사무실에 들렀다. 우리는 광고주 물색과 그 섭외에 관련된 어려움을 놓고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 드물게나마 나와의 친분 연고가 주효하여 광고 유치에 성공하면 함께 기뻐했다. 나는 아나운서 출신의 그 여성 광고부장의 열정에 감동했다.

창간에 별 공로가 없는 내가 창간위원장이 된 것은 좀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나 신문이 창간된 뒤인데도 그런 명칭을 쓰는 데 대해서 이론을 제기했지만, 창간정신을 살린다는 뜻에서 그대로 부르자고 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위원회는 초기엔 자주 모였고, 주로 사내외(경영진·편집국·국민주주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신문사의 중요한 일에 대해서 조언을 하는 자문기구 노릇을 했다. 89년 7월, 방북취재 기획 사건으로 리영희 교수가 구속되고 안기부가 한겨레 편집국을 압수수색했을 때, 창간위원들이 돈을 모아 항의광고를 낸 일도 있다.

‘한겨레 논단’의 고정 필진으로 칼럼을 쓴 것도 내게는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었다. 이름난 석학, 문인 또는 논객들과 윤번으로 쓴 그 글들은 나중에 단행본으로 나와서 호평을 받았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한겨레는 군사정권의 온갖 탄압과 경영의 위기 그리고 사내의 갈등·진통이라는 이중삼중의 어려움 속에서도 민주언론의 소임을 다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 격동의 중심에서 고민하고 고생했던 여러분들을 나는 안타깝게 생각했다.

특히 송건호 사장님의 어려웠던 처지를 전해 듣고는 마음이 아팠다. 한겨레 하면 송건호 선생을 떠올리고, 송건호 하면 한겨레가 연상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는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모든 한겨레 가족이 한마음으로 애도하는 그 장면이 퍽이나 아름답게 보였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지켜 온 한겨레가 이제 다시 권력과 자본이라는 난적과 맞서게 되었다. 나는 20년 전통 위에 다져진 한겨레의 저력을 믿는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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