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2월, 수배중이던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차장을 숨겨줬다는 이른바 ‘범인은닉’ 사건으로 구속된 이돈명 변호사가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후배 고영구 변호사를 보호하고자 ‘거짓 혐의’를 인정해 대신 고초를 치르면서도 밝게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이 이채롭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65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을 전후하여 세 사람의 변호사가 잡혀 들어갔다. 어찌 보면 모두 남의 일로 액운을 만난 셈이었다.
먼저 이돈명 변호사 이야기. 이 변호사님은 법조계의 중진이자 정법회의 어른이고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런 분이 국가보안법 위반(편의 제공)과 범인 은닉으로 구속된 것은 86년 10월 29일이었다. 당시 ‘5·3 인천 노동자 시위’와 관련해 수배중이던 민통련 사무차장 이부영씨를 5개월 동안 자기 집에 숨겨주고 50만원의 도피자금까지 주었다는 혐의였다. 이씨는 안기부원에게 붙잡힌 뒤 이 변호사 집에서 숨어 있었다고 실토(?)를 했고, 이 변호사도 검찰에서나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 역시 원로 신앙인답게 쫓기는 자를 숨겨주었구나 하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불의에 쫓기는 한 마리 양을 보호했을 뿐, 결코 범인을 은닉했다는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 “한 일 없이 부당하게 처벌받는 사람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다.” 이 변호사는 이런 최후진술을 했다. 그리고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실인즉 이 변호사는 이부영씨를 숨겨 준 일이 없었다. 이씨는 고영구 변호사 집에 숨어 있었고, 만일의 사태 땐 이 변호사 집에 숨어 있었다고 둘러대기로 했던 것이다. 설마 이 변호사야 어느 모로 보나 구속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이 변호사가 덜컥 구속되자 고 변호사는 몸 둘 바를 몰랐고, 이 변호사의 고생을 생각해서 그해 겨울을 냉방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 변호사는 이씨가 아닌 고 변호사를 보호해 준 셈이었다. 그리고 검찰과 법원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변호인단도 대부분 모르고 넘어갔다. 얼마쯤 세월이 지난 뒤에 내가 말했다. “진범을 처벌하지 못하게 허위진술을 했으니, 이제 진짜로 피고인(공무집행 방해)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음으론 형법에서 사문화되어 있던 ‘장식(葬式) 방해죄’에 걸린 두 변호사 이야기.
6월 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부산지부 상임집행위원장이던 노무현 변호사와 국본 민권위원장이던 이상수 변호사가 그 희한한 죄목의 피고인이었다. 무대는 경남 거제도, 옥포 대우조선의 노동쟁의로 노조와 경찰이 격렬하게 충돌하다 노동자 이석규씨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참변이 일어났다. 87년 8월 22일의 일이었다. 현지에서는 주민 대표와 노조 집행부가 진상규명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산 국본에 도움을 요청했다. 노 변호사는 거제로 가서 몇 가지 조언을 하였고, 장지는 노조 쪽의 강경한 요청에 따라 광주 망월동 묘지로 정했다. 서울 국본에서는 이 변호사를 파견했다. 그 시점에서 망인의 친척이라는 현역 소령이 나타나 장지를 남원으로 해야 한다고 우겼다. 두 변호사는 장지 문제를 상의한 끝에 유족들에게 “고인의 죽음을 개인의 죽음으로 묻어버리지 말고 잘 생각해서 결정하기 바란다”는 당부를 했다. 이 변호사도 참석한 노조 집행부·재야단체 연석회의에서는 장지를 광주로 결정했다. 8월 28일, 영결식을 마치고 장례행렬이 광주를 향해서 이동하던 중, 고성읍에서 경찰의 포위·제지를 받았다. 이 변호사는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어 충무(지금의 통영)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노 변호사도 부산에서 구속되었다. 죄명은 노동쟁의조정법 위반(제3자 개입)에 ‘장식 방해’가 얹혀 있었다. 들어보지도 못한 장식 방해죄까지 갖다 붙인 것이 희한했다. 공소장을 보면, “… 장례를 주관해야 할 유가족들의 의사에 따른 장례절차 진행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망 이석규의 장식을 방해하고…”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두 분과 잘 아는 사이인데다 국본 상임공동대표 자격으로 현지에 내려갔다. 먼저 9월 7일 충무경찰서에 가서 이 변호사를 만났다. 그리고 당일로 부산으로 가서 해운대경찰서에 갇혀 있던 노 변호사를 접견했다. 두 변호사 모두 어이없는 구속을 당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부산지법은 88년 2월 22일, 노 변호사에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장식 방해 혐의에 대해서는 장례 절차가 최종 결정되기 전에 부산으로 돌아왔다는 이유로 무죄가 났다. 이 변호사는 구속된 지 49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왔으나, 유죄는 면치 못했다. 훗날 이 변호사는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가 이런 핀잔을 들은 일도 있다고 한다. “장(례)식 방해죄로 구속된 사람이 여기 오면 되나? 또 무슨 방해를 하려고!”
성스러운 거짓말로 남의 징역을 대신 살고 나온 변호사, 이미 자연사한 ‘장식 방해죄’에 걸려 감방살이를 한 변호사, 참 기막히고도 우스운 세상이었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성스러운 거짓말로 남의 징역을 대신 살고 나온 변호사, 이미 자연사한 ‘장식 방해죄’에 걸려 감방살이를 한 변호사, 참 기막히고도 우스운 세상이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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