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감사원장(서리)에 지명된 필자가 1998년 3월 3일 청와대에서 김종필 국무총리에 이어 임명장을 받고 있다. 5개월 반이 지나서야 국회의 인준 절차가 끝나 필자는 ‘서리’가 떨어진 감사원장 임명장을 또 한 번 받았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70
1997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이른바 여야 수평적 정권교체가 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 정권 말기에 파탄이 난 환란(IMF 구제금융 사태)으로 말미암아 당선자는 취임도 하기 전부터 위기를 관리하고 대처해야 했다. 한편, 새 정부의 조각을 둘러싼 추측기사 또는 풍선기사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왔다. 감사원장 내정자에 내 이름이 오르내렸다. 나에게는 아무런 연락이나 타진이 없는데, 언론에서만 계속 떠다니고 있었다. 2월이 다 간 어느 날,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동안 언론에 많이 시달리셨지요?” “벌써 감사원장 열 번은 한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대체로 이런 싱거운 말이 오갔다. 지명 통보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락을 구하는 것도 아닌 전화였다. 그러니 사양이고 수락이고 할 여지가 없는 가운데 3월 3일 오후 3시, 청와대에서 감사원장 임명장 수여식이 있었다. 김종필 총리와 나란히 서서 임명장을 받게 되니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 모두 아직 국회의 임명동의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에 ‘서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청와대에서 나오는 길로 감사원으로 직행하여 취임식을 했다. 나는 감사원 쪽에서 써준 취임사 초고를 대폭 손질하여 내 목소리를 담아냈다. 감사원이 갖는 헌법적 위상과 직무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 어떤 부당한 간섭과 외풍도 철저히 배격하겠다. 성역 없는 감사를 통하여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감사원이 되도록 하겠다. 그리고 새 정부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감사, 비리의 제도적 요인을 개선하는 감사, 예방감사에 중점을 두겠다, 이렇게 역설하고 강조했다.
언론에서나 감사원 안에서는 당시 새 정부의 개혁방향과 나의 재야성으로 미루어 과감한 수술이 있을 것으로 보고,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분위기였다. 그런 가운데 사람을 자르고 바꾸어 넣는 식의 파동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취임 후 첫 청와대 보고 때, 감사위원 전원의 유임을 건의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임기가 법에 보장되어 있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전 정권 때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아무 잘못도 없는 위원들에게 사표를 요구하거나 선별 처리를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점을 말씀드렸다. 대통령께서는 소신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감사 업무의 폭주와 인력 부족 실태에 비추어 감사원은 당시 행정부 ‘각 부처 인원 10% 감축 방침’의 적용을 면하게 해주십사 하는 건의도 수용해주셨다.
감사원으로 돌아온 나는 수석감사위원만을 조용히 불러서 감사위원 전원 유임을 알려줬다. 이런 방침은 대통령이나 나의 배려가 아니라 임기가 보장된 법을 존중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국·실장급의 퇴출도 없었다. 그러자 개혁성 부족 운운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인데, 여기에는 인적 쇄신의 참뜻에 대한 오해도 있었고, ‘아랫목 차지’의 욕망도 작용한 것으로 보였다.
다른 부처와는 달리 신상에 불안이 없게 되자, 직원들 사이에 장애 어린이와 소년소녀가장을 돕기 위한 성금 모으기 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매달 봉급에서 얼마씩 떼어서 계속적으로 돕자는 그 운동에 원장인 나도 참여했다.(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뜻밖에도 서리 문제가 정치권의 난제로 장기화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이른바 디제이피(DJP·김대중+김종필)연합 때문에 대선에서 진 한나라당의 제이피에 대한 감정이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은 임명동의안에 대한 표결은 하지 않고, 국회의 임명동의권을 대통령이 침해했다며 헌법소원까지 냈다.
그해 초여름, 정치인들이 모인 어느 자리에서 제이피는 내 손을 잡으면서, “한 원장은 나 때문에 아직도 서리를 못 떼고 있어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웬 서리가 오뉴월이 되었는데도 그대로 남아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때 내가 듣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서리는 아무리 길어 봤자 7·8월이 되면 녹아 없어지겠지요.” 그러는 사이에 한나라당이 제기한 헌법소원은 헌재에서 기각도 아닌 각하로 끝나고, 8월 17일 국회에서는 우리 두 사람의 임명동의안이 가결되었다. 나의 예언(?)대로였다. 서리 임명 후 무려 5개월 반 만의 일이었다. 바로 그다음날 나는 국회 본회의에 나가서 인사말을 했다. “백육십 며칠 만에야 인준을 받고 이 자리에 서게 되니, 통념상의 기쁨과는 또 다른 감회를 숨길 수 없습니다.” ‘또 다른 감회’라는 내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국회의원이 몇이나 되었을까.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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