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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유쾌하게 지켜낸 ‘감사원 독립’ / 한승헌

등록 2009-04-14 19:04수정 2009-04-14 19:12

1998년 9월 감사원장 시절 필자가 주요 감사 결과 및 처분 등을 의결하는 감사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외풍이나  외압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한 감사원장’이었다고 필자는 기억한다.
1998년 9월 감사원장 시절 필자가 주요 감사 결과 및 처분 등을 의결하는 감사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외풍이나 외압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한 감사원장’이었다고 필자는 기억한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71
감사원은 독립이 생명이다. 따라서 외침(外侵) 방어를 잘해야 한다. 원장의 소임도 외풍을 차단하거나 물리치는 일이 그 첫째다. 가상적 또는 잠재적 외풍의 진원은 청와대, 국회, 언론, 이렇게 세 군데다. 그중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청와대와의 관계다.

감사원은 행정부에 속하면서도 대통령으로부터 직무상 독립된 최고감사기관이다. 흔히 감사원장이 대통령한테서 임명장을 받는데 무슨 독립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분에게는 딱 한마디면 된다. “대법원장도 대통령이 임명하는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그래도 사법부의 수장과 행정부에 속한 감사원장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실제로 대통령이나 청와대 참모진의 입김이 폐단을 일으킨 적도 있다. 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청와대를 드나들었다. 즉, 혹시 대통령께서 감사원의 직무상 독립에 어긋나는 지시성 말씀을 하신다면, 그때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몇 가지 ‘모범 답안’으로 정리하여 머리에 입력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재임 중 한 번도 그것을 써먹을 기회가 없었다. 대통령께서 감사원의 독립을 120% 존중해 주셨고, 그만큼 나는 행복한 감사원장이었다. 심지어 아이엠에프 사태를 불러들인 환란(換亂) 감사에 대해서조차 지시는 물론이고 유도성 암시조차 없었다. 모든 감사는 감사원의 독자적인 판단과 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이에 반하여, 국회와의 관계는 난조에 빠질 여지가 있었다. 1998년 10월에 있었던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때의 일을 ‘재생’해 본다. 한 야당 의원이 감사원의 아무개 국장을 불러내어 어찌나 호통을 치고 고함을 지르는지, 정말 목불인견이었다. 내가 기어코 한마디 했다. “추궁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게 언성을 높여 책망만 하면 자유로운 답변이 어렵지 않은가.” 그러자 의원 쪽에서는 무리한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등 억지를 썼다. 부산의 한 택지전환 및 아파트 특혜분양 문제를 놓고 내가 일반감사로 밝혀내겠다는데, 굳이 특별감사를 하라고 요구하기에 점잖게 말했다. “감사의 종류를 놓고 이런 공방을 하는 것은 감사원의 직무상 독립을 흔드는 결과가 된다. 원장 책임하에 잘할 터이니 그쯤 알아주시기 바란다.”

이어서 한 야당 의원이 추궁성 질문을 한다. “감사원은 왜 국정원 같은 힘센 기관에 대해서는 감사를 못하는가?” “무슨 법 몇 조에 국정원에 대한 감사를 제한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의원 여러분께서 만드신 법인데요, 하루속히 법을 개정하여 그런 제한규정을 삭제해 주시면, 국정원에 대해서도 엄정한 감사를 하겠습니다.”

국회 예결위에서 오간 문답 한 대목. “정부가 전년도 국가 결산을 8월 말에야 국회에 보내오기 때문에 새해 예산 편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늦게 내는가.” “예산회계법 몇 조에 의하면, 국가 결산은 다음 회계연도 개시 얼마 전까지 국회에 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부는 그 규정을 지켰습니다. 혹시 더 일찍 받아보시는 게 좋다면, 제출시한에 관한 조항을 개정해 주시면 정부로서는 그 날짜를 잘 지키겠습니다.” 예결위 회의장 뒤쪽에 서서 듣고 있던 정부 국·실장들이 쾌재를 부르더라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나의 이런저런 국회 대응이 기사화된 것을 읽었다는 장관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 “그래도 법사위는 점잖은 편이다. 다른 상임위를 보면 안하무인의 난장판일 때가 허다하다.” 그래도 국회는 국민의 대의기관이니까 끝까지 존중하는 언사를 잃지 않았다. 조직의 보호를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했다.

끝으로 언론과의 관계. 출입기자들과 상견례를 겸한 오찬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여러분의 남다른 양식과 판단력을 믿는다. 다만, 상상력과 창작성도 뛰어나다는 점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머리 좋은 기자들이라 이 대목에서 폭소가 터졌다.) 나는 젊어서부터 언론인들의 변호도 하고 함께 어려움을 나누기도 했으니, 이 점도 참작하여 앞으로 감사원을 잘 봐주시기 바란다.”

사실, 나와 감사원에 대해서 언론은 상당히 호의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언론(인)의 생리라는 것이 있어서 때로는 본성(?)을 발휘할 때도 있기 마련이었다. 가판을 펴보고 나서 담당 기자나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도 하고 간청도 하는 것이 공보관실의 주된 임무이기도 했다. 감사원은 취재 장벽이 높다는 게 기자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만 가운데 하나였다. 월급만 받고 기사를 못 쓰면 회사에 어떻게 들어가란 말이냐는 호소도 나왔다. 나는 공보관을 앉혀놓고 실·국장들에게 일렀다. “기자들 불만에 일리가 있다. 공복에 허기가 지면 헛소리를 하게 되니, 보도자료 준비해 놓았다가 기자들의 기아선상은 면하게 해줄 것.”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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