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8월 감사원 설립 51돌 기념일에 감사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원훈 조형물의 제막식이 열렸다. 필자가 감사원장으로 취임한 뒤 공모를 통해 새로 정한 원훈 ‘바른 감사 바른 나라’가 새겨져 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72
내가 감사원에 부임했을 때, 여러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우선 조직을 개편했다. 7개 국을 6개 국으로 줄이는 대신 국책감사단을 신설해 고속철도·항만·공항·간척·발전소 부문의 건설 등 대형 국책사업의 특별감사를 맡겼다. 그리고 ‘외환위기 특감’에 주력해 그 원인과 책임을 밝혀낸 다음, 방대하고 심층적인 감사결과 보고서를 내는 한편, 일부 고위직에 대한 수사를 검찰에 의뢰했다. 여기서 재임중의 감사활동에 대한 자랑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보아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그밖에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998년 8월 28일 개원 50돌을 기하여 원훈과 원의 상징을 새로 정했다. 감사원 뒷마당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공명정대’를 새긴 바위가 있는데, 그것이 원훈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원훈을 써준 것이 아니라, 써준 것을 원훈으로 삼았다는 이야기였다. 또 마패가 원의 상징이었는데, 그것도 시대의 변화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재검토를 지시했다. 그 결과 두 가지 다 공모를 하기로 했다. 원내외에서 많은 응모작이 들어왔는데, 원훈 당선작은 ‘바른 감사, 바른 나라’로 결정되었다. 상징은 국민의 눈과 귀, 그리고 감사원의 ‘ㄱㅅㅇ’과 사정의 ‘司’자를 상징하는 도안으로 정했다. 원훈 당선작을 낸 분이 군수 시절 운전기사 몫의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관내 순시를 다녔다는 청백리여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나는 간부들에게 ‘감사문장 바로 쓰기’ 교육의 실시계획을 짜보도록 지시했다. 법원·검찰의 문서와 마찬가지로 감사원의 문서 또한 문장이 어렵고 지루하고 구태의연해서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힘든 비민주적 문투가 많았다. 용어가 난해한 것은 물론이고, 아무리 읽어 내려가도 ‘고’ 자와 ‘며’ 자만 나올 뿐, ‘다’ 자가 안 보인다.
이런 폐단을 바로잡고 ‘표현의 민주화’를 익히고자 특별교육을 한다고 했더니, 국립국어원의 이익섭 원장을 비롯한 학자·전문가들이 크게 반기면서 몸소 강사로 참여해 주었다.
그해 6월 1일부터 사흘 동안 감사원 대강당에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이 특별교육은 여러 언론으로부터 ‘감사원의 국어 과외’ ‘공문서 민주화’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뜻밖에도 난처한 일이 생겼다.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앞서의 ‘감사문장 바로 쓰기’ 교육을 이유로 나를 ‘우리말 으뜸 지킴이’로 뽑은 반면, 주민등록증 한자 병기를 지시했다고 해서 김종필 국무총리를 ‘우리말 으뜸 훼방꾼’으로 선정한 ‘사건’이었다. 그 모임의 대표인 이오덕 선생에게 나의 난처한 심정을 말씀드리고, 취소나 ‘비보도’를 요청했으나 허사가 되었다.
감사원은 공직자의 잘못을 캐내고 신상에 불리한 처분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은, 잘못했다고 처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한 사람 찾아서 상도 주는 선례가 있기는 했다. 다만 그것이 홍보가 되지 않아서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나는 출입기자들에게 점심을 사면서, 일년 내내 나쁜 공직자 기사만 쓰지 말고 모범 공직자의 선행 기사도 가끔 써달라고 간청을 했다. 기자들은 처음 한두 달은 감사원이 선정한 ‘공직자 모범 사례’를 기사로 써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었다. 인천지역의 한 구청 직원을 모범 공무원으로 선정해서 통보까지 했는데, 그다음날 조간을 보니, 업자로부터 정기 상납을 받아온 부패 공직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끼어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서 취소를 하느라고 담당자가 허둥댄 것은 물론이었다.
컴퓨터 교육에 얽힌 사연도 있었다. 나는 감사원에 들어가기 전, 변호사 사무실 근처의 한 신문사에서 하는 컴퓨터 교육에 나간 적이 있는데, 큰 사무실에 가득 찬 수강생들 틈에 끼여서 듣는 무료 강습이라 그런지 학습효과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감사원에 부임한 지 얼마 뒤부터 아침 업무 시작 전에 한 시간씩 전산담당관실의 ‘도사’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았다. 나는 본시 ‘기계치’여서 이해와 진도가 지진아 수준이었지만, 독재시대의 ‘중단 없는 전진’이란 말까지 되새기며 꾸준히 익혀 나갔다. 하루는 그 고수가 하는 말인즉, 원장에게 너무 많이 가르쳐 드리면 우리가 곤란해지니 적당히 하라고 원의 간부들이 자기에게 경고를 주더라는 것.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컴맹’을 겨우 면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원내외 전문가들을 강사로 초청하여 ‘정보화 동향 설명회’를 주기적으로 열어 급변하는 정보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한편, 전 직원에 대한 컴퓨터 활용능력 평가제를 시행하여, 다가오는 큰 변화에 뒤지지 않도록 이끌어 나갔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컴맹’을 겨우 면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원내외 전문가들을 강사로 초청하여 ‘정보화 동향 설명회’를 주기적으로 열어 급변하는 정보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한편, 전 직원에 대한 컴퓨터 활용능력 평가제를 시행하여, 다가오는 큰 변화에 뒤지지 않도록 이끌어 나갔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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