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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도네이션, 더네이션, 다네이션 / 한승헌

등록 2009-04-20 19:07수정 2009-04-20 22:20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75
1999년 가을, 감사원장 자리에서 정년퇴임한 나는 재야 법조계로 돌아왔다. 9월 28일에 신분 회복이 된 셈이어서 ‘9·28 수복’이라고 했다. 대법관을 역임한 박우동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그해 11월에 법무법인 ‘광장’의 식구가 되었다. 그때는 강남의 포스코빌딩에 사무실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법조계 원로 축에 끼게 되어서 변호사의 일선 업무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고위 공직자의 짐을 벗고 ‘무사귀환’한 홀가분함이 잠시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로부터 두어 해가 지난 2002년 2월 어느 날, 성공회의 김성수 주교님이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그분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이하 공동모금회) 회장으로 2년 동안 근무하고 임기가 차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나보고 후임자가 되어 달라는 청이었다. 나는 그 분야를 잘 모르는데다, 나대로 그려보는 설계가 있고 해서 사양했으나, 어려운 소외계층을 돕는 ‘사랑의 징검다리’라는 소임에 마음이 끌리어 결국 수락을 했다.

 공동모금회는 외환위기로 나라가 어려웠던 98년에 설립된 전국 최대의 민간 모금단체로서, 나는 그 3대 회장이 되었다. 공동모금회의 중추인 윤수경 사무총장은 군사정권 시절, 종로5가 중심의 기독교단체에서 힘든 일을 맡아 헌신했던 역량 있는 여성 운동가였다.

 공동모금회가 하는 일은 크게 모금과 배분 사업으로 나뉘어 있는데, 배분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소관 위원회에서 전담하고, 회장인 나는 주로 모금 활동, 즉 돈을 많이 거두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자면 기업이나 단체·기관의 고위직들을 만나서 되도록 많은 기부를 권하는 한편, 신문·방송 등 언론매체를 통한 홍보성 활동에도 나서야 했다.

 세계적인 골프 스타 박세리 선수가 2억원의 성금을 가지고 우리 모금회를 찾아왔을 때였다. 많은 언론사의 카메라맨(카메라우먼도)들이 법석이었다. 성금을 받고 나면 회장인 내가 인사를 한다. 판에 박은 말 외에 기부자에게 합당한 덕담을 한다.

 “기독교인들이 외우는 ‘주기도문’을 패러디해서 한 말씀 하겠습니다. 박세리 선수, 올해는 제발 (골프)공이 벙커에 들어가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홀(컵)에 바짝 붙게 하옵소서.” 모두들 뜻밖이었는지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그해 연하장에 내가 쓴 ‘화위귀’(和爲貴)라는 글이 새겨진 미루나무 붓통을 답례로 박 선수에게 건네면서, 한마디 더 했다. “여기 새겨진 한문은 화목 또는 화합이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박 선수는 아무쪼록 드라이버와 화목하고, 아이언과 화목하고, 퍼터와도 화목하여 다승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청와대에서 고액기부자들(기업과 개인)을 초청해서 오찬을 베풀 때였다. 나는 ‘어원 연구’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운을 뗀 뒤, 이런 말을 했다. “기부란 말의 영어 ‘도네이션’(donation)은 한국말 ‘돈 내쇼’에서 나와서 ‘도네이션’으로 진화한 것입니다. 도네이션의 어원국답게 앞으로도 기부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당시 고건 서울시장은 ‘도네이션’은 구식 발음이고, ‘더 내쇼’의 ‘더네이션’이 맞다고 했는데, 또다른 한 분은 영어 ‘O’는 ‘아’로 발음하니까, ‘다 내시오’의 ‘다네이션’이 옳다고 하였다.

 덕담뿐이 아니었다. 경기장의 엠브이피(MVP)처럼 기부액이 적힌 넓은 판을 기부자와 함께 들고 기념사진도 찍는다. 백화점의 성탄절 점등식에도 나간다. 수재민들에게 보낼 김치 담그기의 퍼포먼스에도 출연한다. 흔히 미국의 기업(70%)과 개인(30%) 대비 기부액 비율을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당장은 기업 중심의 모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해마다 연말을 앞두고 조수미·신영옥 같은 유명한 성악가를 초청하여 기부자에 대한 사례 및 기부자 발굴을 위한 음악회(무료)를 여는 것도 그런 마케팅과 연관이 있다.


 2002년 12월 중순께, 나는 서울 북쪽 근교 산비탈에 있는 한 불우시설을 찾아갔다. 장애인인 원장과 남편인 목사님 부부가 48명의 장애인을 돌봐주고 있는 ‘미신고 시설’이었다. 그곳에 얼마간의 구호 금품을 전하고 격려의 말을 한 다음 장애 어린이들과 함께 모금 캠페인 방송용 공익광고를 찍기도 했다.

 2003년 3월에는 북한 돕기를 위한 방북도 했다. 그때 본 평양 인민병원과 어린이집의 열악한 시설들이 지금은 얼마쯤 나아졌는지 궁금하다.

 ‘사랑의 택배업자’ 2년 동안의 체험은 나의 토정비결에도 없는 가외의 보람이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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