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1월 2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필자의 변호를 받았던 ‘피고인’들이 사건 체험실록을 모아 헌정한 회갑기념문집 <분단시대의 피고들>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박형규 목사, 이돈명 변호사, 필자 부부, 안병무 박사, 이세중 변호사, 장을병 교수가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80
나는 지금까지 서른 권이 넘는 책(문고본 네 권 포함)을 냈다. 이건 결코 권수 자랑이 아니라 ‘자원낭비’의 고백일 뿐이다. 그나마 글의 품질로 따지자면 더욱 면구스러워진다. 내용을 대략 분류하자면, 시집, 수상·평론집, 저작권에 관한 책, 나의 변호사건 실록물, 유머 책, 일본어 번역본 등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연대순으로 보자면, <인간귀향>(1961)과 <노숙>(1967)이란 두 권의 시집이 먼저지만, 습작을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어서 ‘호적’에 등재하기를 주저해왔다. 산문집으로 맨 처음 나온 나의 단행본은 <법과 인간의 항변>(1972. 한얼문고)이었다. 신문·잡지 등에 실린 글들을 모은 책으로, ‘법과 법조의 풍토’ ‘문학과 법의 갈등’ ‘법의식과 인간 소외’ ‘자유언론의 시련’ ‘갈망의 창변’, 이렇게 몇 개의 장(章)으로 짜여 있다. 사륙판 416쪽, 인디언 페이퍼에 양장본으로, 37년 전 출판물로는 겉모양의 품격이 제법이었다. 그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납덩이 같은 침묵이 외계에 가득할수록 필부의 초라한 밀실 안에선 갈망의 농도가 짙어 간다. 부끄러운 고해도 역이(逆耳)의 비판도 바로 그런 갈망 때문이었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유신지배로 치닫던 시절, 30대 젊은 법조인의 ‘우국’이 배어 있는 대목이었다. 1974년 범우사에서 나온 <위장시대의 증언>은 이 연재 40회에서 이미 쓴 대로, ‘어떤 조사’란 글이 반공법 필화를 맞아서 판금 도서가 되었다. 나는 징역살이는 물론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하여 실업자가 되었고, 책은 압수를 당해서 출판사도 큰 화를 입었다. 책 머리 자서(自序)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역서(曆書)에 어긋나는 동천(冬天) 아래 우리는 때아닌 이변과 수없이 조우해 왔습니다. … 파장을 넓혀가는 인동(忍冬)의 숨소리가 그 많은 차단과 굴절을 겪으면서도, 끝내는 존엄한 섭리로 이어질 것이라는 신앙을 버리지 못합니다.’ 박 정권의 ‘유신’ 광풍 속에서 쓴 독백이자 다짐이었다. <내릴 수 없는 깃발을 위하여>(1983), <허상과 진실>(1985), <법창에 부는 바람>(1986)은 내가 실업자 시절에 운영하던 삼민사에서 출판한 책들이다. 인세 절약을 겸해서 내 글을 자급자족한 셈이었다. 내가 명색이 저작권학도로서 낸 책으로는 <저작권의 법제와 실무>(1988. 삼민사)와 <정보화시대의 저작권>(1992. 나남)을 들 수 있다. 앞서 적은 대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까, 교재용으로도 내가 쓴 책이 필요했다. 국내외적인 저작권 환경의 변화에 따라 나는 책을 다시 써야 했는데, 도서출판 나남에서 개정판과 3정판을 계속 내준 것이 무척 고마웠다. 내가 변호한 정치적 사건 또는 시국 사건의 실록물로는 <정치재판의 현장>(1997. 일요신문사), <분단시대의 피고들>(1994. 범우사),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전 7권, 2006. 범우사) 등이 세상에 나왔다. 그중 <…피고들>은 나의 회갑 기념 문집으로서, 내가 변호한 시국사건 ‘피고인’ 44명이 각자의 사건과 수난 체험을 기록한 글을 모은 책이어서, 나의 저작물은 아니지만 나를 위한 책이니만큼 나로서는 여간 소중하지가 않다.
<…변론사건 실록>의 간행은 나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60년대 후반 이후 변호한 시국사건은 100건이 넘는데, 그중 67건의 실록이 모두 일곱 권의 책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법정에서 진실과 법이 통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렇다면 훗날 기록을 통하여 국민과 역사 앞에 실상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결심의 열매라 할 이 실록에는 사건마다 나의 해설에 이어서 사건 당사자의 체험수기·공소장·변론서·최후진술·판결문·항소(또는 상고)이유서·참고문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실록을 발간함으로써, 나는 변호사의 또하나의 사명인 ‘기록자’ ‘증언자’로서의 소임을 얼마쯤 해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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