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필자가 쓴 <산민객담-한승헌 변호사의 유머산책>의 일본어 번역판 <한 변호사의 유머>의 출판기념회가 도쿄에 이어 오사카에서 열렸다. 필자와 절친한 리쓰메이칸대학의 오쿠보 시로 교수가 일역본 책을 들어 보이며 축하의 말을 하고 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81
일반적으로 ‘약력 소개’에는 그 사람의 내세울 만한 직함이 열거된다. 그런데 때로는 마음 아팠던 상처와 고난까지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그런 식의 소개를 받고 단상에 오를 때면, “양력(약력) 소개를 하신다더니 음력 소개까지 해주셨다”고 한마디를 얹기도 한다. 인생살이를 편의상 양지와 음지로 나누어 본다면, 나는 그 명암의 극과 극을 체험한 축에 속한다. 공직 중심으로 늘어놓으면 햇볕이 쨍쨍하지만, 박해와 수난을 떠올리면 화면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만다.
나는 지금 내 삶과 유머의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고 있다.
흔히 해학·풍자·유머·조크·위트 등 유사개념의 용어가 많지만(이하 ‘유머’란 말로 포괄한다.), 그 공통인자는 역시 웃음이다. 하지만 그 역(逆)이 모두 진(眞)은 아니다. 모든 웃음이 다 유머는 아니란 말이다.
생각건대 나는 웃을 만한 일이 별로 없는 환경에서 살아왔다. 가난·전쟁·고학·반독재·감옥, 그 어디에 웃을 일이 있었겠는가. 소위 ‘관직’도 나름이어서, 내가 맡은 감사원이나 검찰 등의 공직은 하나같이 법규범과 엄격성의 틀에 얽매이는 자리여서 웃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변호사는 남의 불행을 떠맡아서 해결해주어야 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공사간의 생활이 ‘웃음 친화적’이 아닌데도 나에게 얼마쯤 유머 기질이 있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기도 하다. 음지와 양지의 극한지대에서 아주 숨이 막히거나 좌절하지 않고 살아온 데는 유머라는 정서적 동반자의 ‘백업’이 주효했다. 나를 인터뷰한 기사에서도 으레 유머를 즐기는 사람으로 소개를 한다.
“변호사라 딱딱한 분으로 알았는데, 만나보니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러니까 저는 이중인격자 아닙니까.” 그렇다. 유머를 비장한 ‘이중인격자’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그 힘든 세상을 살아올 수 있었단 말인가.
유머는 ‘어전’ 같은 엄숙하고 재미없는 공간에서 구사하면 더욱 빛난다. 김대중 대통령 집권 초기, 청와대 만찬에서 어떤 인사가 말했다. “청와대는 감옥과 같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감옥은 들어갈 때 기분 나쁘고 나올 때 기분 좋은데, 청와대는 그와 반대로 들어올 때는 기분 좋은데 나갈 때 기분이 안 좋은 곳이니까요.”
감옥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겨울날 갑자기 전 재소자의 파자마를 수거해 갔다.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보안과장에게 물었다. 파자마로 목을 맨 자가 생겨서 그러니 이해를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좀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라며, 아이디어를 주었다. “파자마 아닌 다른 것으로 목매는 건 못 막지 않느냐. 그러니 아예 전 재소자의 모가지를 가져다 영치시켰다가 출소할 때 돌려주면 목매는 사고는 방지가 될 텐데….”
세상사 비판에도 우회적인 표현이 좋다. 한때 케이에스(KS)니 티케이(TK)니 하는 그릇된 학벌사회 풍조가 몰아칠 때, 나도 학벌 자랑을 했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도 하버드대학을 나왔다. 모년 모월 모일, 하버드대학에 들어가 옌칭연구소에서 강연을 하고 나서 캠퍼스를 돌아본 뒤 분명히 그 대학을 나왔다. 물론 졸업했다는 말은 아니고.” 유머는 그냥 재미로 끝나버리는 말의 유희가 아니다. 정서의 고갈과 일상의 삭막함을 치유하는가 하면, 완충·해방·여유·공감 유발 따위의 기능도 따른다. 민주사회에서 특히 강조되는 소통과 친화력 그리고 설득을 위해서도 유머는 필수과목이다. 비판과 저항, 통념 파괴 등의 사회적 처방으로 생각이 미친다면 유머는 참으로 의미있는 무기일 수도 있다. 나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서 유머가 우리 삶에 평화와 품격을 담보하는 보편적인 ‘신물질’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날 5년에 걸쳐서 독서잡지 <책과 인생>에 <산민객담>이란 유머 칼럼을 연재했고, 그것을 두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세상에 내보내기도 했다.
직구만 잘 던져서 좋은 투수가 될 수는 없듯이, 사고와 언어의 세계에도 커브나 언더스로 또는 체인지업을 배합할 줄 알아야 한다. 유머는 생산원가가 거의 없고, 그 활용 또한 아직은 면세다. 그런데도 그 저변이 넓지 않다. 특히 정치인들의 언어폭력은 정치를 저질화시켜 혐오와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정치권의 유머교육이 시급하다. 우선 지도자들부터 유머를 터득하여 국민에게 웃음을 주고 품격을 인정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미국 대통령 중에 유머 전속작가를 두고, 그가 써준 원고를 놓고 리허설까지 했다는 뉴스가 생각난다. 웃기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유머의 만인화’, 이것이 나의 지나친 기대일까.
한승헌 변호사
세상사 비판에도 우회적인 표현이 좋다. 한때 케이에스(KS)니 티케이(TK)니 하는 그릇된 학벌사회 풍조가 몰아칠 때, 나도 학벌 자랑을 했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도 하버드대학을 나왔다. 모년 모월 모일, 하버드대학에 들어가 옌칭연구소에서 강연을 하고 나서 캠퍼스를 돌아본 뒤 분명히 그 대학을 나왔다. 물론 졸업했다는 말은 아니고.” 유머는 그냥 재미로 끝나버리는 말의 유희가 아니다. 정서의 고갈과 일상의 삭막함을 치유하는가 하면, 완충·해방·여유·공감 유발 따위의 기능도 따른다. 민주사회에서 특히 강조되는 소통과 친화력 그리고 설득을 위해서도 유머는 필수과목이다. 비판과 저항, 통념 파괴 등의 사회적 처방으로 생각이 미친다면 유머는 참으로 의미있는 무기일 수도 있다. 나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서 유머가 우리 삶에 평화와 품격을 담보하는 보편적인 ‘신물질’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날 5년에 걸쳐서 독서잡지 <책과 인생>에 <산민객담>이란 유머 칼럼을 연재했고, 그것을 두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세상에 내보내기도 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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