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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때리는 일본 감싸는 미국 ‘은밀한’ 속셈 / 정경모

등록 2009-05-10 18:32수정 2009-05-10 18:35

1951년 9월 8일 2차 세계대전을 종식하고자 일본과 연합국 48개 나라가 맺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서명을 하고 있다. 일본은 이 조약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승인했지만, 독도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주장해왔다.
1951년 9월 8일 2차 세계대전을 종식하고자 일본과 연합국 48개 나라가 맺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서명을 하고 있다. 일본은 이 조약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승인했지만, 독도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주장해왔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

이 글을 쓰느라고 <재팬타임스>에 연락해 거의 60년 전의 내 투고가 실린 신문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더니 친절하게도 창고 안의 파일을 뒤져 보내왔더군요. 내가 한창 혈기왕성했을 때 분통이 터져 쓴 그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참으로 감회가 깊을 수밖에요. 그 글에는 일본인들이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말할 때는 언제나 내세우는 ‘천손민족’(divine race)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말도, 미국 사람들 좀 보라는 듯이 나와 있어요. 그것을 보고 무언가 짚이는 점이 있어 쓴웃음을 지은 미국인들도 더러 있었을 터이지요.

우리나라 신화에 천제(天帝) 환인이 손주인 환웅을 하계로 내려보내 그 아들 단군으로 하여금 아사달을 도읍으로 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있지 않아요? 일본에도 꼭 같은 신화가 있어, 다카마가하라(신들이 사는 하늘나라)에 있던 하늘신 아마테라스가 손주인 니니기를 다카치호(현 규슈 미야자키현)로 내려보내 나중에 ‘야마토’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인데 그건 누가 보아도 우리 신화의 재탕 아니겠어요?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던 1950년대만 해도 ‘우리는 천손이니까 귀한 종이고, 너희들 조센진은 천손이 아니니까 천민’이라고 믿는 일본 사람들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판을 치고 있었던 것이에요. 일본인들의 이 얄팍한 우월감은 일본을 점령하고 있는 미국인에 대해 품을 수밖에 없는 열등감을,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으로 약간이나마 희석시켜 보려는 심리적 메커니즘의 결과라고 봐야 옳겠지요. 나는 남북이 갈라져 서로 치고 때리고 하는 한국전쟁 바로 그 당시 일본에 와서 일본인들이 자행하는 행태를 목격하면서 오히려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며 내가 비록 남쪽 사람이라고 해서 북쪽 사람들을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굳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재팬타임스>에 실린 내 글에는 도쿄 쓰키지 라면집에서 일어났던 끔찍스러운 사건을 예로 들어 무엇 때문에 일본의 언론은 아무 근거도 없이 조선인을 범인으로 단정하고 그렇게까지 호들갑스럽게 야단법석을 쳤는가, 점잖게 호된 일격을 가했던 것이지요.

그 글의 반응은 상당한 것이었어요. 아침에 사령부에 나가보니 같은 사무실의 한국인 동료들이 “그 글을 읽고 3년 묵은 체증이 떨어진 것 같더라. 앞으로도 그런 필치로 계속 글을 써 줬으면 좋겠다”고들 격려해 주더군요. 미국 사람들로부터도 동감을 표하는 편지가 여러 통 전달돼 왔어요. 그중에는 “일본인 사회에서 차별받고 있는 코리안들을 위해 참으로 적절한 발언을 했다”는 것도 있었는데, 지금 먼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어요.

나이는 젊었겠다, 약간은 우쭐대는 기분도 나지 않았겠소이까. 그런데 그 패기 때문에 코가 납작하게 얻어맞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며칠 뒤 맥아더 사령부의 꽤 높은 자리에 있는 민간인 상사로부터 곧 출두하라는 호출을 받았어요. 그는 상당히 좋지 않은 낯으로 나를 나무랍디다. 앞으로 <재팬타임스>에 그 따위 글을 쓰면 곤란하다구요. 문득 언론 자유가 있는 나라가 미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으나, 감히 그 높은 분 앞에서 대드는 말을 할 수도 없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더니, 그대가 정 그런 종류의 글을 쓰고 싶다면 사령부의 직함인 ‘DAC’(육군부 민간인 직원)라는 타이틀은 쓰면 안 된다, 그런 글은 미-일 간의 우호 관계를 해치는 행위이니 몸조심하라고 타이르더군요.

그 책망하는 소리를 듣고 나오면서 마음이 착잡하지 않았겠소이까. 일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짓을 미 군부는 다만 묵인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감싸주고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미국과 일본은 손잡고 우리를 때리는 가해자이고, 남북을 막론하고 우리 민족은 피해자라는 것이 아닌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때가 1951년 3월 아니에요? 그 순간에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으나, 그 해 9월이 되면 미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고, 같은 날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되는 것이니, 3월인 그 무렵 군사적인 협력을 얻기 위해 미국이 얼마나 일본과의 우호 관계에 신경을 썼겠어요?


그때 내 뒤에는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구요, 또 미 점령군 사령부라는 어마어마한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니, 대한민국의 국민치고 출세나 영달을 위해 나 정경모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또 있었겠소이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죠. 그 글은 시대 조류를 역행하는 것으로 일관된 이후 나의 인생 역정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그 예고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40년 가까운 고달픈 망명 생활이었으니까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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