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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신사참배’ 거부한 당돌한 아이 / 정경모

등록 2009-05-17 18:48

1930년대 후반 서울 용산역 주변에 있던 한 신사에서 심상소학교(옛 보통학교)의 일본 학생들이 동방요배를 하고 있는 장면. 그 무렵 우신보통학교에 다니던 필자 역시 영등포역 앞에 있던 신사에서 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당했다.  사진 사료연구가 정성길씨 제공
1930년대 후반 서울 용산역 주변에 있던 한 신사에서 심상소학교(옛 보통학교)의 일본 학생들이 동방요배를 하고 있는 장면. 그 무렵 우신보통학교에 다니던 필자 역시 영등포역 앞에 있던 신사에서 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당했다. 사진 사료연구가 정성길씨 제공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0
앞 글에서 <구약-출애굽기>에 나오는 약속의 땅에 대한 신앙이 당시 기독교인들의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사상적 배경이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여기에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배일(排日)감정이 곁들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을 듯하오이다.

러일전쟁(1904~05) 이후 미국과 일본 사이의 외교관계가 급속도로 험악해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미국이 물심양면으로 베풀었던 막대한 원조 덕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히 간통이 부풀어 오른 일본이 고분고분 미국의 말을 안 들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오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철도왕 해리먼은 전쟁 동안 단독으로 500만달러라는 거금을 전비로 일본에 대출해준 사람인데, 남만주철도를 공동경영하자는 그의 제안을 일본은 걷어찬 것이지요. 미-일간의 불화는 그 뒤 일본이 원폭세례를 받던 날까지 40년 동안 계속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우리나라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들은 선교사이기 전에 역시 미국 국민이며, 미-일 간의 국가적인 알력에서 비롯된 선교사들의 배일감정이 미묘하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반일감정과 맞아떨어진 일면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지요.

러일전쟁 이전에도 왜인들이 명성황후(민비)를 참살했을 때(1895년 8월), 겁에 질린 고종 황제가 시종들이 가져오는 식사를 믿지 못하여, 언더우드 부인과 헐버트 부인이 손수 장만해 오는 음식이라야 잡수셨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왜인들의 만행에 대해 미국 선교사들이 분개를 느낀 것은 사실이었사외다.

얘기를 다시 만주사변으로 돌려, 1931년 그때 막 보통학교(소학교)에 들어간 내가 그 시대를 어떻게 지냈나 얘기를 하겠소이다. 사변이 일어나자 총독부 당국은 3·1운동으로 팽창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억누르는 한편, 조선인들의 황민화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인데 그 수단의 하나가 보통학교 아이들에게 강요되었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였던 것이외다.

동방요배란 매일 아침 교정에 늘어선 아동들이 멀리 동쪽 방향에 있는 일본 ‘천황 폐하’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고, 신사참배란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두 차례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역전마을 신사에 행렬을 짓고 찾아가, 선생의 호령에 따라 참배의 절을 올리는 것이었소이다. 그 짓이 시작된 것이 아마 내가 4학년인가 5학년 때부터였다고 기억하는데,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아이니까 그 따위 우상숭배 같은 것은 안 할 것 아니오이까. “요하이”(요배)라고 호령이 걸렸는데 나는 뻣뻣하게 그냥 서 있었던 것이지요. 그걸 발견한 것이 아다치라는 일본인 여자 선생님이었소이다. 그때는 교장은 으레 일본 사람이고, 보통교사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반반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튼 정아무개, 이 아이가 무엄하게도 동방요배 때 뻣뻣하게 서 있더라고 해서 큰 문제가 됐을 것 아니겠소이까.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이강민이라는 조선사람이었는데 아마 교장실에 불려가 어찌된 셈인가고 나 때문에 문초를 받으신 것 같습디다. 다음날 나를 조용한 데로 불러 물으십디다. 어떻게 된 셈인가고 말이외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했어요. 예수를 믿는 집안이라서 우상숭배는 못한다고 말이외다. 선생님께서 아마 기가 차셨겠으나, 조용히 나를 타이르십디다.

‘동방요배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고, 먼 데 있거나 가깝게 있거나, 동네 어른께 아침인사를 드리는 셈 치고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그 대신 신사참배가 있는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너는 지각을 해라. 묵인해 주겠으니.’ 이래서 선생님과 보통학교 생도인 나 사이에 타협이 성립된 것이었소이다. 그 타협안대로 나는 아침마다 하는 동방요배는 시키는 대로 했으나,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버젓하게 지각을 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일본인 교장 기다 선생이 우리 집을 찾아와 아버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는데, 그때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내게는 하지 않으셨으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담임 선생과 나의 타협을 인정하겠다는 것을 알리려고 일부러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겠소이까.

그때만 해도 아직은 어수룩했던 때였고, 또 선친께서 교회의 장로로서 그래도 그 마을에서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것을 감안하여, 내 당돌한 행동을 묵인해준 것이라 하겠지요. 더구나 우리 반 담임이시던 이강민 선생께서 섣불리 이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옳지 않겠나 하고 일본인 교장에게 진언을 했을 것이라고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아아- 그랬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오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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