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경기중학교 38회 졸업앨범에 나와 있는 18살 때의 필자(왼쪽). 김교신(오른쪽) 선생은 경기중에서 불과 6개월 만에 추방당했지만 필자가 잊지 못하는 스승이다. <성서신학>을 창간한 민족주의 신학자인 그는 양정중 시절 손기정 선수의 은사이기도 하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1
소학교에서의 신사참배는 겨우겨우 모면할 수가 있었으나, 중학교에 갈 나이가 가까워지니 이게 문제가 되지 않았겠소이까. 그나마 평양 숭실학교는 그때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던 터이니, 그럼 숭실중학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나. 그런 생각도 하시면서 선친께서도 상당히 고민을 하고 계셨지요.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의 옥중순교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의 일이나, 숭실학교라고 해도 무릎을 꿇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은 뻔한 노릇이었고, 입학한다 해도 평양에는 어린 나를 보살펴줄 만한 친척이나 연고자도 없었고 말이외다. 그래서 6학년 때까지 담임이었던 이강민 선생의 권유로 경기중학(그때는 경성 제1고보)의 입학시험을 치게 된 것이었소이다. 요행이라고 할까, 뒷걸음질치던 소가 쥐를 잡았다고나 할까. 여간한 수재가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한다는 그 경기중학 입학시험에 합격이 된 것이었소이다. 뭐 장원급제나 했다는 듯이 주위 사람은 다들 좋아하지 않았겠소이까. 그런데 4월 1일 입학식이 끝나고 15일이 가까워오자 내 어린 가슴에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소이다. 그날이 오면 남산에 올라가 조선신궁에다 대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해야 되는 날이거든요. 나는 아버님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겠소이까. 헌데 아버님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십디다. 하나 안 하나, 그 판단을 내게 맡기시는 것이지요. 그날이 왔소이다. 경기중학에는 일본군 육군소령을 비롯하여 세 사람의 배속장교가 있었는데, 그 배속장교 우두머리가 교장 이하 전 교원과 천여명의 전교생을 인솔하고, 나팔을 불면서 남산 꼭대기로 행진해 가지 않겠소이까. 드디어 전원이 신궁 앞에 정렬하고 늘어서자 “사이케이레이”(최경례) 구령이 떨어지더군요. 만일 절을 안 한다면 그땐 나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 모두가 잡혀 들어가는 판 아니겠소이까. 무섭습디다. 정말 무서웠어요. 얼떨결에 자세가 무너지면서 허리를 굽혔소이다. 그 순간 어린 소년의 넋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지요. 그 뒤 경기중학을 나올 때까지 5년의 세월은 내게는 형무소살이나 다름없는 고역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사외다. 이른바 황민화교육을 철저하게 실시하던 학교였으니, 1학년 담임이던 히라마라는 일본인 교사가 가르치는 역사시간에는 “우리나라와 신라”라는 말이 천연덕스럽게 나오지 않소이까. 일본이‘우리나라’이고 ‘신라’는 외국이라는 식의 교육이오이다. 더욱 기가 차는 것은 그 ‘수재’라는 것들이 그저 앵무새 모양으로 “우리나라와 신라”를 되풀이하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어요. 무슨 저항 같은 것을 느끼는 친구를 나는 그때 찾아볼 수가 없었소이다. 어느날 그 히라마라가 무슨 기름종이 같은 것을 돌리면서, 거기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모필로 써서 제출하라고 합디다. 그것은 국기게양대 밑에 묻어 영원히 보존될 것인데, 그로써 너희들은 천황폐하의 적자로서 영광스러운 대일본제국의 국민이 되는 것이라고 엄숙한 훈시를 내립디다. 그 ‘황국신민의 서사’라는 것은 “우리들은 황국신민이로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리” 운운의 문구가 나열된 것인데, 그때 그 히라마라라는 자의 거만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역력하게 떠오르는 것이외다. 1937년에 입학해 42년에 졸업한 나는 그러니까 경기중학 38회 졸업생이 되겠는데, 아마 동기 중에 잠시나마 김교신 선생께서 경기중학에서 교편을 잡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나 싶으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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