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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해방공간, 치열하게 살다간 내 친구 혁기 / 정경모

등록 2009-05-20 20:35

1946년 1월15일 미군정청이 치안 목적으로 창설한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그 하루 전 열병훈련을 하고 있다. 그 엿새 뒤 이들은 건준 계열의 국군준비대 사무소를 습격해 첫 충돌을 빚는다. 당시 국군준비대를 이끈 이혁기 총사령관은 필자의 경기중학 38회 동기다.
1946년 1월15일 미군정청이 치안 목적으로 창설한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그 하루 전 열병훈련을 하고 있다. 그 엿새 뒤 이들은 건준 계열의 국군준비대 사무소를 습격해 첫 충돌을 빚는다. 당시 국군준비대를 이끈 이혁기 총사령관은 필자의 경기중학 38회 동기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3
이왕 경기중학 38회 ‘임오군단’ 얘기가 나온 김에 동기 졸업생 중에서도 뛰어난 수재였던 이혁기군의 추억담으로 그 시절 얘기를 마감했으면 하오이다.

아마 4학년 때였나 같은 반이었는데, 혁기가 앞, 내가 뒷자리에 앉아 공부를 했소이다. 그때 나는 학교에 멀미가 나 있던 터라 영어도 그렇고 수학도 그렇고 성적이 신통치 않았소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낙제도 퇴학도 안 맞고 졸업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인데, 혁기 요 녀석은 아, 수재라는 건 이런 놈을 가리키는 것이로구나, 참으로 감탄스러울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소이다.

어느날 이화여전 음악과에서 성악을 하던 누나-결핵으로 일찍 죽었지만-가 교과서로 쓰고 있던 영어책(오페라)을 가져와 휴게시간에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혁기가 나더러 “인마, 네 실력으로 그게 뭔지나 알고서 보고 있느냐?” 해요. 그게 아마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주제로 한 오페라였다고 기억하는데, 실상 나는 실력 부족 탓으로 그림만 보고 있던 참이었소이다. 혁기는 그걸 뺏어다가 쑥 훑어보더니, “그 두 남매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팠는데 그런 때는 기도를 하라고 엄마가 일러줬다는 얘기로구나” 하고는 돌려줍디다. 나는 속으로 “참 그 녀석 대단한 영어 실력이로구나” 하고 감탄할 따름이었소이다.

그런 재주꾼이니까 졸업도 하기 전 4학년 때 성대(경성제국대학) 예과 시험을 치더니 제꺽 합격을 합디다. 그러고서 성대 제복이었던 망토를 걸치고 ‘호바’(朴齒)라고 하는 굽 높은 나막신(게다)을 신고 경기중학 교정에 나타났을 때, 비단 나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선망에 찬 눈으로 혁기를 쳐다봤을 것 아니오이까. 찬란한 모습이었죠.

그 혁기가 성대 재학 중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육군 소위로 해방을 맞아 돌아와서는, 바로 ‘학병동맹’(學兵同盟)을 조직하고, 당시 몽양 여운형 선생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건국치안대’를 흡수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더니, 드디어 ‘국군준비대’라는 것을 창설해 그 지휘관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소이다. 그 휘하의 부하가 6만을 넘었다니, 그 위세가 얼마나 당당했겠나 상상해 보소. 국군준비대는 짧은 ‘해방공간’에서 최강의 군사조직이었소이다. 그러니 미군정청은 곱지 않은 눈초리로 혁기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을 터인데, 해방되던 바로 그해 겨울 명동사무소에서 대회를 열고 이청천, 김원봉, 무정, 게다가 김일성까지 넣어 이분들을 정신적인 지도자로 모시겠노라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외다. 이청천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3·1운동 때 일본군을 뛰쳐나와 항일운동에 몸 바쳤던 일본 육사 26기생이고, 김원봉은 의열단을 창설해 무장투쟁을 하다가 임정 산하로 들어가 광복군 부사령관을 했던 인물이며, 무정은 조선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마오쩌둥의 장정에 가담했던 사람이 아니오이까?

나중에 정식으로 국군이 되는 ‘국방경비대’가 발족된 것이 해방 이듬해인 46년 1월 15일인데, 그 20일 앞선 45년 12월 26일 그 네 사람을 정신적인 지도자로 추대한다는 혁기 조직의 대회가 열렸소이다. 그리고 1월 20일 군정청 산하의 국방경비대가 국군준비대의 명동사무소를 습격하게 되는 것이외다. 사람이 많이 죽었답디다.

나는 그 습격 때 직접 부대를 지휘한 것이 지난날의 이응준 대좌였는지, 또 그 습격부대에 경기중학 임오군단의 면면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는 없소이다. 다만, 상징적으로 말해서, 이응준 대좌와 같은 일본 육사 26기생이었던 이청천 장군을 정신적인 지도자로 모시는 이혁기 군대와, 이 대좌의 훈도를 받은 임오군단의 병력이 대적해서 서울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6·25 전쟁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고, 또 그 비극적인 전쟁의 최초 전투였다는 것을 밝혀두고자 하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이혁기의 군대에 대해서 내가 이만큼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브루스 커밍스의 명저 <한국전쟁의 기원>의 일본어판을 내가 번역해서 출판까지 한 까닭인데, 이 책을 보면 당시 혁기는 포로가 되어 군정재판에서 3년 징역형을 받은 것으로 발표됐으나, 실제로는 종적이 없어진 것이외다. 몰래 지시를 받은 누군가의 총에 사살당한 것이라고 동창생 하나가 알려주더이다. 혁기의 그때 나이가 스물두 살이었소이다.


문득, 내가 저승에 가서 혁기를 만난다면 이런 얘기가 오가지 않을까 상상해 봤소이다.

“아무리 역사에는 만일이 없다고는 하나,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길도 있었을 텐데… 후회는 없나?” “야 인마. 너는 네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간 것이고, 나는 나대로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간 것뿐인데, 뭐 후회 같은 것이 있겠나.” “맞는 말이다. 후회는 없어.”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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