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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폭풍 전야에 만난 평생 배필 / 정경모

등록 2009-05-24 19:43

도쿄에서 전철로 1시간 남짓 남쪽에 자리한 요코하마의 자택 정원에 서 있는 필자. 1943년 게이오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처음 구한 히요시 마을의 하숙집이자, 그 하숙집의 딸인 부인 지요코를 만나 지금껏 해로하고 있는 바로 그 집이다.
도쿄에서 전철로 1시간 남짓 남쪽에 자리한 요코하마의 자택 정원에 서 있는 필자. 1943년 게이오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처음 구한 히요시 마을의 하숙집이자, 그 하숙집의 딸인 부인 지요코를 만나 지금껏 해로하고 있는 바로 그 집이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5
1942년 일본에 건너와 1년 동안 재수 생활을 하면서 기숙한 곳은, 내 자형(죽은 누님의 남편)이 역시 유학생으로 호세이(법정)대학을 나올 때까지 돌봐준 어느 명망가의 저택이었소이다. 그런데 이듬해 입학한 게이오대학이 그 댁에서 통학하기에는 너무 멀고 해서 부득이 학교 근처에 하숙집을 구해야 했어요. 그러자 마침 그 댁 부인께서 내게 귀띔을 해주십디다. 요코하마 히요시에 있는 게이오대학 교정의 일부가 해군에게 접수당해 군인들이 몰려들고 있어, 그 근처 주민들은 어차피 방을 빌려줘야만 한다면 군인보다는 학생들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노라고. 그길로 히요시 마을을 깡그리, 거의 반나절이나 헤집고 돌아다녔으나 헛걸음이었소이다. 빈방이 없다는 것이지요. 실망 끝에 마지막 걸음이라 치고 어느 길목으로 들어서니 양옆으로 아담한 집들이 늘어서 있는 주택가가 나타나더이다. 언뜻 보니 마당의 잔디밭도 손질이 잘 되어 있고, 계단 문에서 현관까지의 오솔길도 굴곡이 있어 운치가 있는 집이었소이다. 현관으로 들어서니 주인 아주머니가 나오시기에, 게이오대학 의학부 신입생인데 하숙을 찾고 있노라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소이다. 그때 내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사외다. 얼굴에는 여드름이 더덕더덕 나 있었고요. 아주머니가 그래도 밉지 않게 나를 보셨는지 내일 다시 한번 와보라고 하시더군요. 지금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의논해서 알려주겠노라고 말이외다.

프로테스탄티즘인 장로교를 창시한 사람이 칼뱅인데, 그는 예정론이라는 것을 주장했어요.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즉 죽어서 천국으로 갈 수가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조물주에 의해 미리 결정이 돼 있다는 것-이것이 예정론이 아니오이까. 죽는 순간이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역정의 총결산의 순간일 터이며 그렇다면 그 일생의 모든 희비애락은 미리 예정된 프로그램에 따르는 것이라는 뜻이니, 칼뱅은 장로교 신자들에게 인생은 팔자소관이라는, 일종의 숙명론을 가르쳤다는 것이 되지 않겠소이까. 아무리 내가 장로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한들, 곧이곧대로 숙명론 따위를 믿을 수가 있겠소이까?

그런데 이상스러워요. 팔십 평생을 살아온 지금 일생을 되돌아본다면, 그때 열아홉 살 나이에 하숙집을 찾느라고 히요시 마을, 그집 현관문을 연 그 순간, 나의 인생역정의 전부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오이다. 예정론 그대로예요.

다음날 또 갔어요. 오라는 대로. 그 아주머님께서 언제고 이사를 오라 그러시더군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내일 이삿짐을 가지고 오겠다 하고 집을 나왔소이다. 그 집 따님을 만나볼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외다. 그때 얼굴도 안 보고 나온 그집 따님 지요코(千代子)가 오늘까지 백년해로로 인생길을 같이 걸어 온 현재의 아내이며, 나를 극진히 귀여워해주시던 아주머님이 장모님이셨던 것이외다.

그래서 그 집 아주머님, 따님, 그리고 하숙생인 나 셋이서 아침,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오순도순 한지붕 아래서 생활을 하게 된 것이외다. 따님은 그때 나와 동갑인 열아홉, 가톨릭계 성심여자전문 2학년 재학중이었지요. 그 댁의 주인 아저씨는 당시 니혼유센(日本郵船)회사 선원으로, 병원선인 히카와마루라는 큰 배를 타고 늘 외국을 여행 중이어서, 몇 달 만에 한번씩 들러서는 남양군도 쪽의 전황이 퍽 불리하다는 걱정스러운 얘기를 남기고 곧 또 배를 타고 떠나고는 했소이다.

입학식 직후인 그해 4월,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해군대장이 탄 탑승기가 솔로몬군도에서 추격당하여 전사한 뒤 그 추도회가 학교에서 열리고 하여, 무언가 엄청난 사태가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은 있었으나, B-29기의 폭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다음해에 들어서서부터였으며 나는 공부에 열중하면서 평온한 학창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당시의 일본에서는 의학생이라 하면 으레 독일어 공부에 노력을 집중해야 해서, 우리반 아이들도 누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독일어로 먼저 부르게 되나 경쟁을 벌였는데, 나는 성악을 전공하던 누이가 늘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던 까닭에, 물론 가사는 우리말이었으나 멜로디는 몸에 배다시피 했고 해서, 반에서 제일 먼저 세레나데를 부를 수 있었소이다. 그로부터 몇 십 년 뒤 의사가 아니라 운동가로 일본에 다시 와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맥주라도 몇 잔 걸치게 되면, 곧잘 슈베르트의 가곡들을 독일말로 뽑아 박수갈채를 받고 한 것은, 게이오대 시절 길러 둔 실력 덕택인 것이외다.

엄동설한이 닥쳐오기 전, 평온하고 바람 없는 동지 전후의 며칠 동안을 영어로 ‘핼시언 데이즈’라고 부르는데, 내게는 대학 예과 1학년 때의 그 안온했던 시절이 딱 그런 나날이었지요. 그 뒤 곧 엄동설한이 들이닥치게 되는 것이오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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