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대낮에 미군 대형 폭격기 B-29의 편대가 몰려오는 것을 멀리서나마 처음 목격한 것은 1944년 11월쯤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그 폭격기들은 미타카에 있던 비행장을 목표로 날아들어왔던 것이외다. 그해 6월에 이미 미 기동부대가 사이판섬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신문에도 나왔으니, 머지않아 그 섬을 기지로 삼은 장거리 폭격기가 일본 본토 공격을 하리라는 예상은 하고 있던 터였지요.
45년으로 들어서자 정월부터 꽤 자주 공습경보가 울리고 하더니, 바로 3월 10일 새벽, 무려 300기가 넘는 B-29가 떼지어 몰려와 도쿄 일대가 쑥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날 밤 불타 죽은 사람이 10만명을 넘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사외다. 내가 있던 히요시는 멀리 폭격기가 도쿄로 가는 길목이었던지,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보일 듯한 저공비행으로 수도 없이 날아갑디다. 사다리를 놓고 지붕에 올라가서 보니 도쿄는 불바다예요. 마침 러일전쟁 때 일본이 승리를 거둔 봉천싸움을 기념하는 육군 기념일인 그날을 잡은 미군의 공습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시무시합디다. 그 공포 분위기 속에서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주머님, 치요코, 그리고 나 세 식구였지 않소이까. 그때 이미 나 자신은 하숙을 한다기보다는 친척집에서 기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고, 치요코는 치요코대로 외동딸로서 형제 없이 자랐으니, 우리는 서로 사촌오누이쯤으로 여기게 되지 않았겠소이까. 더구나 식량이 부족해 감자나 야채를 물물교환해서 구해 오느라 둘이서 촌마을을 돌아다녀야 했어요. 그러니 아무리 유다른 민족주의자라고 해도, 조선과 일본을 가르는 거리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던 것이외다.
그러던 6월초 어느날, 집에서 편지가 날아들어왔더이다. 놀라웠던 것은, 어떻게 입수했는지, 도쿄에서 후쿠오카까지의 기차표가 동봉되어 있었어요. 그때쯤이면 그런 차표는 여간한 재주가 아니고서는 일본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었사외다. 그리고 언제이건, 화요일 오전 열시까지 후쿠오카 근처인 간노스 비행장에 가서 기다리면 비행기가 서울까지 태워다 줄 것이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선친의 분부가 첨부되어 있었소이다. 그때는 학교도 지방 어느 도시로 소개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 참이었고, 관부 연락선은 미 해군 잠수함에 의해 모조리 격침되어 뱃길도 끊어져 있었지요. 귀한 아들 거기 두었다가는 폭격 맞아 죽을 거라고, 양친께서 필사의 노력을 다하여 마련한 것들이었사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용산에 사령부를 두고 있는 일본 육군 제20사단의 연락기가 매주 화요일 꼭 한 번, 여의도와 간노스 비행장을 왕복하고 있었는데, 그 연락기의 일본인 조종사에게 돈을 주고 부탁을 한 것이었소.
어렴풋하기만 하나 어느 일요일 아침 나절에는 도쿄역에서 기차를 탔을 것이외다. 후쿠오카까지는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여행이었으니까, 후쿠오카 시내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열시에 맞춰 간노스 비행장으로 갈 예정이었지요.
문제는 집 떠나기 전날 저녁 때 벌어진 드라마였사외다. 내일 아침이면 떠나야 되는데, 다감했던 소년이 이태 동안이나 있던 집을 떠나게 되면서,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있었겠소이까. 어머니는 방에 계시고, 치요코와 나는 마당 걸상에 앉아 서로 아무 말도 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소이다. 그날따라 B-29의 내습도 없었고, 초여름 맑은 하늘에는 조용히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사외다. 그 무렵에는 히요시의 하늘에서도 밤이 되면 찬란한 은하수가 흐르는 것을 확실하게 볼 수가 있었으니까요.
그때 치요코는 살며시 내 어깨에다 머리를 얹고 있더니 잠시 후부터 훌쩍거리기 시작합디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그의 쓰라린 마음을 위로해줄 수가 있었겠소이까. 처음으로 치요코를 가슴에 안고 귀에다 대고 약속을 했소이다. 꼭 다시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요.
몇 시나 되었을까. 내가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노라니 멀리 자기 방에서 치요코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점점 그것이 목 놓아 우는 소리로 변하지 않소이까. 이거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고 하는데 아주머니가 들어오시더군요. 그리고 물으십디다. 저 애가 저렇게 울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고. 치요코를 방으로 데리고 오시라고 말씀드리고, 두 사람 앞에서 엄숙하게 약속을 하였소이다. 틀림없이 다시 돌아올 터이니, 내 말을 믿고 기다리고 있으라고요.
다음날 집을 나서는데 도쿄역까지 배웅하러 나가겠다던 치요코는 눈이 퉁퉁 부어 도저히 외출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소이다. 대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도쿄역으로 향한 것인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죠. 정말로 그날부터 5년4개월 만인 1950년 10월 약속한 대로 돌아서 돌아서 태평양을 건너 히요시의 옛날 그 집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오이다. 기적이란 이런 일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겠소이까.
재일 통일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