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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집에서 맞이한 해방…‘구세주’가 된 미국 / 정경모

등록 2009-05-26 21:00

1945년 8월15일 낮 12시 서울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경성방송 라디오를 통해 무조건 연합군에 항복한다는 일왕의 ‘옥음방송’을 들으며 침통해하고 있다.(왼쪽) 같은 방송을 듣고 일제의 패망을 확인한 조선 사람들은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게양하며 해방의 감격에 들떠 있다.  도깨비뉴스 제공
1945년 8월15일 낮 12시 서울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경성방송 라디오를 통해 무조건 연합군에 항복한다는 일왕의 ‘옥음방송’을 들으며 침통해하고 있다.(왼쪽) 같은 방송을 듣고 일제의 패망을 확인한 조선 사람들은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게양하며 해방의 감격에 들떠 있다. 도깨비뉴스 제공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7
45년 6월 어느 월요일 저녁쯤 후쿠오카에 도착해 여관을 정하고 책이니 노트니 챙겨 넣은 짐을 풀었소이다. 그때는 식량이 없어 여관에서도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도 없는 시절이니, 히요시의 하숙집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신 주먹밥으로 저녁 끼니를 때우고, 피곤한 김에 곯아떨어졌는데 별안간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옵디다.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벌써 불길이 바로 옆집까지 타오르고 있지 않소이까. B-29기의 폭격이 시작된 것이외다. 짐 같은 것을 챙길 겨를도 없이 그냥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가는 무슨 공원 같은 데서 그 밤을 새우고, 동이 트자 걸어서 비행장을 찾아갔소이다. 평상시라면 후쿠오카 시내에서 간노스까지는 노면전차가 있었을 터이나 다 끊긴 상황이라 바닷가 길을 따라 비행장에 당도하니 그때가 아마 오전 9시 전인가 했소이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우두커니 서서 편지의 지시대로 10시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요. 그렇게 서 있노라니 과연 상공에 잠자리만한 비행기가 나타나 착륙을 합디다. 연락기예요.

비행기가 다시 하늘로 뜨는데 같이 탄 어느 일본인이 귀띔을 해줘요. 용산 육군사령부에서 나온 정보로는 근처에 미군 항공모함은 없으나, 혹시라도 그라만 전투기를 만나게 되면 현해탄에 떨어져 바닷고기들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이외다.

바다 위를 나는 약 한 시간가량 긴장은 하고 있었으나 날씨는 맑았고 발밑으로 흘러가는 흰구름 아래로 보이는 푸른 바다의 경치는 아름다울 뿐이었소이다. 아무튼 눈 깜짝할 사이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오이다. 그날 저녁에는 부모님께서 어디서 그 귀한 쇠고기를 구해 오셨는지 너비아니랑 진수성찬이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져 있었소이다.

그 무렵 조선 사람들 사이에는 일본이 지는 날 우리는 해방되고 나라가 독립할 것이라는 카이로선언(1942년 11월)의 약속이 막연하게나마 꽤 널리 퍼져 있었소이다. 이 소식이 밖으로 새어나온 통로는 둘이었다고 후에 알려졌는데, 하나는 <경성방송국>(JODK) 조선인 직원이 우연히 방청해서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 또 하나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 산하의 한 경기중학생이 자기 손으로 조립한 단파 라디오를 집 지하실에서 듣고, 즉시 이 소식을 몽양 선생께 알려드렸다는 것이외다. 아무튼 이런 소문 때문에 특히 부인들은 비행기 위에서도 곧 식별할 수 있도록 흰 옷을 입고 다녔다고들 해요. 흰 옷이라면 조선 사람이라는 표시고, 미국 전투기라면 응당 조선 사람에겐 총질은 안 할 것이 아니겠는가-이 믿음은 자기 집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두면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인 줄 알고 화를 면하게 해줄 것이라고 한 <구약> 유월절에 대한 믿음 바로 그것인데, 이 소박한 믿음이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히게 되는가, 또 그것이 얼마나 크나큰 실망을 내게 안겨주게 되는가는 차차 밝혀두고자 하는 바이외다.

그렇지만 카이로선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고, 일본이 언제 항복해서 언제 우리에게 해방이 찾아올 것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소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도적과 같이’(마태복음 24장), 드디어 그날은 온 것이외다. 8월15일 낮 12시 정각. 경성방송 라디오에서 이른바 히로히토 천황의 ‘옥음방송’이 시작되었는데, 당시의 라디오는 워낙 잡음이 심해서 잘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다는 취지만은 정확하게 알 수가 있었사외다.

아버님께서 온 가족을 방안에 불러 앉혀 놓고 해방의 날이 왔음을 하나님께 감사하시며, 또 주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을 가져다 준 미국에 대해 축복을 내려 주십사고, 목멘 울음소리로 기도하시던 모습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에 선하오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으로 일제를 무찌르고 해방의 환희를 우리에게 안겨다 준 미국에 대한 감사는 선친이나 나나 꼭같이 진지하고 강렬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사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실제로 오키나와를 출발한 하지 중장 휘하의 제24군단이 21척의 함선에 분승하여 제7함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사흘 동안 항해를 거쳐 9월8일 인천 월미도에 도착한 뒤, 200대의 트럭에 나눠타고 경인가도를 질주하면서 서울로 입성하게 되는 것은 다음날인 9월9일이었으나, 해방이 전해진 그날, 조선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고 하도 좋았던 나머지 집에서 몰래 담가 두었던 막걸리를 독째로 길에 내다가 가는 사람 오는 사람 한 모금씩 퍼주고 하는 등 온통 잔치 기분으로 들떠 있었던 것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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