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9일 일본 정부 대표인 가와베(왼쪽) 육군 중장이 필리핀 마닐라의 미군기지에 도착해 윌로비(오른쪽) 준장의 안내를 맡고 있다.(왼쪽 사진) 45년 해방 이후 서울~인천, 서울~부산을 오가던 특급 증기기관차 ‘해방자호’의 모습. 필자가 당시 미군을 환영한 단어도 ‘해방군’이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8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이 땅에 오기 며칠 전, 이미 38선으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소이다. 더구나 오키나와의 미군과 총독부 사이에 어떤 무선 연락이 오가고 있었는지, 또 9월 6일 미군 선견대가 비밀리에 비행기로 서울로 날아와 총독부의 일본인들과 흥겨운 술잔치로 시간을 보내면서 어떤 밀담을 주고받았는지,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역사 전문가를 포함하여-과연 몇 사람이나 되는 것일까. 의아스러움을 억누를 수가 없소이다.
38선에 의해 우리나라가 미국-소련 두 나라의 관할구역으로 나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해방의 그날부터 열흘쯤 지난 8월 25일께가 아니었나 싶은데, 그 소문이 불과 5년 뒤에 올 무서운 재앙의 불씨였다는 사실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사외다.
일본 정부의 대표로 육군 중장 가와베가 마닐라에 도착한 것은 8월 19일이었고, 뒤에 정식으로 발표될 연합군 사령부의 ‘일반명령서(General Order) 제1호’를 미리 맥아더로부터 받은 것은 이튿날이었는데, 바로 그 명령서 안에 38선 설정에 관한 설명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외다. 서울의 조선총독부가 도쿄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 8월 22일로 기록에는 남아 있는데, 무슨 영문인지 이것이 정식으로는 발표되지 않고 소문으로만 퍼져 모이면 웅성웅성 화젯거리가 되고 있었소이다.
그러던 9월 2일, ‘P-18기’인가 하는 동체가 둘인 비행기가 날아와 여의도비행장 상공을 선회하더니 삐라(전단)를 뿌리고는 어디론지 사라집디다. 닷새 뒤에도 또 삐라를 살포하더이다.
마을 사람들이 내가 영어를 안다고 해서 그 삐라를 가지고 와서 묻지 않았겠소이까. 무슨 뜻인가 하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나, 영어를 좀 안다는 나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이나 무식하기는 매한가지였던 것이외다. 그 문장이 진짜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솔직히 말해 그때 내게는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외다. 그 삐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어요.
‘① 미군이 상륙한 뒤 제반명령은 현존하는 행정기구를 통해 반포된다. ② 일본인 및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는 엄벌에 처해질 것인데, ③ 그 엄벌에는 사형도 들어 있다.’
만일 그때 이 문장의 진의를 이해했다면, 당연히 이게 도대체 무슨 허튼소리냐고 화를 냈어야 옳았을 게 아니오이까?
‘① 우리는 해방이 됐다고 좋아서 날뛰고 있는 판인데 어째서 총독부를 통해서 명령을 받아야 하는가. ② 미 상륙군은 그렇다 치고, 일본인에 대한 반란행위를 엄벌에 처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③ 사형까지 시킬 수 있다니, 이것이 과연 우리를 해방시켜줬다는 미국이 하는 말로서 타당한 말인가?
이제 화제를 돌려 인천 월미도에 상륙한 하지 중장의 미군 부대가 200여대의 트럭을 타고 경인가도를 질주하면서 서울로 입성하던 9월 9일날 얘기를 하기로 합시다. 나는 그 미군부대를 환영하느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전날부터 집에서 법석을 쳤소이다. 그때만 해도 귀중품이었던 옥양목을 두 필이나 풀어, 영어로 하나에는 ‘우리의 해방군(Emancipator) 미군 대환영’이라고 쓰고, 또 하나에는 ‘평화의 사도’(Apostles of Peace)라고 내 손으로 먹글씨를 써서 횡단막(플래카드)을 만들지 않았소이까. 그리고 다음날 낮 영등포역 앞 큰길에 늘어선 군중들에게 그 횡단막을 높이 쳐들게 하고 나는 만세를 부르면서 미군부대를 맞이했소이다. 이거 굉장히 역설적이고, 또 예언적인 광경이 아니었을까요. 미군이 들어옴으로써 일어난 것은 전쟁이었지 ‘평화’는 아니었소이다. 또 그들이 우리에게 진정 ‘해방’을 안겨주었다면 무엇 때문에 ‘제2의 해방’이나, ‘제2의 건국’을 부르짖는 소리가 나왔겠소이까?
그런데 내가 그 횡단막에 쓴 ‘해방군’이라는 영어가 그들에게 퍽 인상적이었던지, 미군정이 실시되자마자 서울과 인천 사이를 달리던 소형 증기기관차(SL)에 ‘해방자’라는, 우리말로서는 설익고 어색한 이름이 붙어 있어 쓴웃음을 머금게 하더이다.
아무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미군은 조선 사람들이 적개심을 품고 총질이나 폭탄 같은 테러행위라도 하지 않을까 상당히 겁을 먹고 있었다는 것이외다. 그건 자기네들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여차하면 한판 붙을 각오로 잔뜩 긴장해서 서울로 향하고 있던 까닭인데, 오히려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고 해방군으로 자기들을 맞이해주는 것이 퍽 의아스러웠다는 것이외다.
그들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겁을 먹은 채로 우리나라로 들어왔는지, 이제 그 이유를 말해야 할 차례가 된 것 같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이제 화제를 돌려 인천 월미도에 상륙한 하지 중장의 미군 부대가 200여대의 트럭을 타고 경인가도를 질주하면서 서울로 입성하던 9월 9일날 얘기를 하기로 합시다. 나는 그 미군부대를 환영하느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전날부터 집에서 법석을 쳤소이다. 그때만 해도 귀중품이었던 옥양목을 두 필이나 풀어, 영어로 하나에는 ‘우리의 해방군(Emancipator) 미군 대환영’이라고 쓰고, 또 하나에는 ‘평화의 사도’(Apostles of Peace)라고 내 손으로 먹글씨를 써서 횡단막(플래카드)을 만들지 않았소이까. 그리고 다음날 낮 영등포역 앞 큰길에 늘어선 군중들에게 그 횡단막을 높이 쳐들게 하고 나는 만세를 부르면서 미군부대를 맞이했소이다. 이거 굉장히 역설적이고, 또 예언적인 광경이 아니었을까요. 미군이 들어옴으로써 일어난 것은 전쟁이었지 ‘평화’는 아니었소이다. 또 그들이 우리에게 진정 ‘해방’을 안겨주었다면 무엇 때문에 ‘제2의 해방’이나, ‘제2의 건국’을 부르짖는 소리가 나왔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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