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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민단도 총련도 ‘손에 손잡고’ 몽양 추모 / 정경모

등록 2009-06-01 18:45수정 2009-06-01 22:34

1985년 7월 몽양 여운형 선생의 39주기를 맞아 필자가 도쿄에서 마련한 첫번째 추도강연회는 ‘민단’과 ‘총련’이 함께한 뜻깊은 자리였다.
1985년 7월 몽양 여운형 선생의 39주기를 맞아 필자가 도쿄에서 마련한 첫번째 추도강연회는 ‘민단’과 ‘총련’이 함께한 뜻깊은 자리였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21
1945년 9월 9일, 휘하 제24군단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인천 가도를 질주해 서울에 입성한 하지 중장이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당시 총독 아베 노부유키와 마주앉아 항복문서 조인식에 임한 것은 그날 오후 3시45분이었고, 간단히 그 식이 끝난 것은 오후 4시20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소이다.

그것이 끝나자마자 총독부 정문에서 나부끼고 있던 일장기는 내려지고, 대신 성조기가 군악대의 취주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게양되었는바, 그것으로 시작되는 미국의 지배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해방이 아니라 분단의 질곡을 부르는 신호였다는 사실을 누가 그 당시 예견할 수가 있었겠소이까.

이쯤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약간이나마 철이 들고 인간으로서의 각성을 한 이후 항상 민족의 걸출한 사표로서 우러러보면서 살아온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에 관한 얘기오이다.

해방 이듬해쯤 우리 집은 영등포를 떠나 서울시내 원서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 바로 옆 동네가 몽양 선생께서 사시던 계동이었으니 말하자면 이웃간인 셈이었소이다. 또 집에서 인사동 거리를 거쳐 종로로 나가려면 안국동 네거리 모퉁이에 근로인민당이라는 간판을 건 몽양 선생의 사무실이 있고 해서, 길에서나마 멋진 양복 차림을 하신 몽양 선생의 모습을 꽤 자주 뵈올 수가 있었소이다. 그러나 선생께 아는 체를 하면서 인사를 드린다거나, 댁으로 찾아가서 말씀을 듣는다거나 하는 일은, 물론 나이가 어렸던 탓도 있었겠으나 언감생심 생각도 못하고 지냈소이다.

그 후 몇십년이 지나 내가 망명객으로 일본에 와서 민족운동을 시작했을 때 마음속으로는 몽양 선생의 전도사임을 자처하고 있었던 터이며, 더구나 재일동포 사회가 민단과 총련으로 갈라져 서로 으르렁대며 사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문득 영감(인스피레이션)처럼, 좌우 내지 남북을 아우를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 바로 몽양 선생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가더이다. 이런 연유로 85년 7월 19일, 몽양 선생의 39주기를 맞아 첫번째 추도강연회가 도쿄 아르카이다 강당에서 열린 것이었고, 그 후 해마다 추도회는 계속되었소이다.

특히 첫번째 열렸던 몽양 추도강연회는 성대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뜻깊은 모임이었어요. 48년 남과 북으로 분리정권이 수립되는 바람에 재일동포 사회도 민단과 총련이라는 두 단체로 나뉜 것인데, 원래는 하나의 조직인 재일조선인연맹 산하 단체였던 것이며, 몽양 선생께서 흉탄을 맞고 암살당하시던 47년 7월, 두 단체의 성원들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비명에 돌아가신 선생의 서거에 눈물을 흘렸다는 전사(前史)가 있었던 것이오이다. 몇십년 만에 남과 북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오로지 한 분의 넋을 기리며 서로가 격조했던 아쉬움을 말하며 술잔을 나누었으니 가히 획기적인 모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이외다.

그런데 또 이상스러운 일은 바로 이 추도회가 그로부터 4년 뒤 문익환 목사와 나의 평양행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오이다. 87년인가 유엔 주최로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국제 여성문제 회의에 일본에서 취재차 간 분이 <아사히신문>의 여성 기자 마쓰이 야요리였는데, 그 나이로비 국제회의에 조선 대표로 평양에서 온 분이 공교롭게도 몽양 선생의 둘째 따님인 연구(燕九)씨였던 것이외다.

마쓰이 여사는 지금은 고인이나, 옛날 일본군이 저지른 위안부에 관한 만행을 국제적으로 규탄하는 일로 한창 뛰고 있을 때였고, 그런 일로 인해 나와는 늘 연락이 있던 분이니까 당연히 정아무개가 주최하고 있는 몽양 추도회에 대한 이야기가 연구씨와의 대화에서 화젯거리가 되지 않았겠소이까. 억울하게 총을 맞고 돌아가신 자기 선친을 잊지 않고 그 넋을 기리는 추모회를 매년 열고 있는 남쪽 사람이 망명객으로 일본에 와 있다는 소식은 퍽 의외로웠을 것이며, 또 가슴에 북받쳐 오르는 것이 있지 않았겠소이까.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던지 연구씨는 마쓰이 여사 앞에서 엉엉 목을 놓고 울었다는 것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몽양께서 서거하신 지 25일 만인 47년 8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 100만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나, 나는 8월 15일 미국으로 유학 가는 배를 탈 예정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까닭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그로부터 4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 내가 일본에서 개최하는 몽양 추모회가 인연이 되어 문 목사와 더불어 평양을 방문하게 되는 것이니, 참으로 섭리라는 것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일까, 경이로움을 느낄 때가 없지 않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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