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1947년 8월 선친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고 배민수 목사 부부. 일제 때 미국 망명을 갔다 해방 직후 귀국한 배 목사는 ‘하나님 사랑, 노동 사랑, 농촌 사랑’의 ‘삼애 정신’으로 농촌 발전에 헌신했다. 삼애교회 제공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24
지금 돌이켜보면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 대립이 불꽃을 튀기는 중에서, 불과 4년 뒤 닥쳐올 6·25 전쟁이 거의 확실하게 그 징조를 나타내고 있던 해가 아니었나 생각되오이다.
‘탁치’를 반대하는 우익의 운동은 어느새 탁치 자체의 가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친미반소 운동으로 변질돼 갔으며, 따라서 탁치를 찬성하는 좌익의 운동은 불가피하게 반미친소 운동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는 양상이 되었소이다. 이 통에 일단 3월에 열렸던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돼 5월에는 무기휴회로 들어갔으니 미-소 간의 냉전은 세계 어디서보다 한반도를 무대로 가장 첨예하게 전개되었던 것이었소이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승만 박사는 그해 6월 3일 남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이른바 ‘정읍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에는 북벌 주장도 포함되어 있었사외다. 김구 선생께서 이 박사와 손을 끊은 것이 아마 그때가 아니었나 싶고, 또 몽양 선생께서 위기감을 느끼시면서 좌우합작 운동을 시작하신 것도 그 무렵으로 추측되는 바이외다.
그 불길한 46년을 돌이켜보면 잊을 수 없는 것이, 추수가 끝난 10월 공출 문제로 대구에서 발생한 농민항쟁인데, 치열했던 항쟁 자체보다도 내가 더 충격을 느꼈던 것은 조선어 학자 이윤재 선생의 자제분이 대구경찰서를 습격했다는 죄로 군정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사실이었소이다.
한뫼 이윤재 선생이 누구신지 지금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나, 일제 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잡혀 들어가 함흥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으신 저명한 어학자이신데, 선생을 고문으로 죽인 함흥경찰서 친일 경관이 해방 이후 월남해 대구경찰서 서장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외다. 이 선생의 자제분이 이 사실을 알고 대구항쟁 때 농민들과 합세하여 경찰서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게 된 것인데, 미군정청으로서는 반도(叛徒)는 반도이고 경찰은 경찰이었겠지요. 각계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그 자제분은 사형에 처해진 것이었소이다. 이 선생은 마침 내 누나가 다니던 배화여고 교사였던 까닭에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친일파들의 발호를 규탄하는 큰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소이다.
아무튼 이듬해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있던 어느날, 선친께서 미국에서 돌아오신 배민수 목사님을 만나고 오셨다면서 얘기 끝에 슬며시, 너 미국 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고 물으시지 않아요. 마치 내 마음을 떠보시는 것같이 말이외다.
배민수 목사는 일제 때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 용케 빠져나가 10여년 동안이나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시다가, 해방이 되자 군정청 직원이 되어 돌아오신 분이었어요. 퍽 어렸을 때 선친께서 내 손을 잡으시고 배 목사님 부인이 홀로 아들을 키우며 기약 없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사시던 댁을 가끔씩 찾아가신 일이 있었소이다. 그 댁의 주소가 서대문 근처 홍파동 10번지였다는 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인데, 지금 생각하면 홀로 사시는 부인께 약간이나마 생활비를 건네드리기 위해 찾아가신 것이 아니었겠소이까.
헌데 배 목사가 무슨 이유로 미국으로 망명하셨나, 굳이 감출 필요도 없어 그 이유를 밝히겠는데, 왜 김일성 주석의 부친이 기독교 장로이신 김형직 선생 아니십니까. 이분께서 조직한 민족운동 단체가 국민회였는데, 원래 평양 분이신 배 목사가 거기에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외다. 그 낌새를 챈 일본 경찰이 추적을 시작하자 미국으로 피신했던 것이지요.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물론 훨씬 후의 얘기오이마는.
결과적으로 나는 47년 8월 군정청이 발급한 여권을 가지고 배 목사의 아들과 같은 배를 타고서 미국으로 떠나게 된 것인데,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고 사뭇 나를 권유하시던 선친이나, 또 귀가 솔깃해서 그럼 가마고 나선 나 자신이나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득실상 도무지 계산이 맞지 않는 이상스런 판단을 내린 것이오이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고 그냥 서울대 의대에 눌러앉아 공부를 계속한다면 3년 뒤인 50년에는 졸업해 의사 자격을 딸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뭣 때문에 그것을 팽개치고 의대도 아닌 문리대학으로 전학을 할 결심을 하였는지.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내 눈으로 한 번 보고 싶다는 충동의 탓이었을까. 아무튼 미국으로 떠난 것이외다. 떠나기 전 무슨 생각이었는지 안국동에 있는 라세진 교수 댁을 찾아가 작별인사를 드렸는데, 그때 만일 그대로 서울대에 있었더라면 훗날 라 교수처럼 나도 인류학의 대가로 이름을 날릴 수도 있지 않았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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