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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47년 미국행…그 이유는 지금도 ‘가물가물’ / 정경모

등록 2009-06-04 18:36

필자가 1947년 8월 선친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고 배민수 목사 부부. 일제 때 미국 망명을 갔다 해방 직후 귀국한 배 목사는 ‘하나님 사랑, 노동 사랑, 농촌 사랑’의 ‘삼애 정신’으로 농촌 발전에 헌신했다.  삼애교회 제공
필자가 1947년 8월 선친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고 배민수 목사 부부. 일제 때 미국 망명을 갔다 해방 직후 귀국한 배 목사는 ‘하나님 사랑, 노동 사랑, 농촌 사랑’의 ‘삼애 정신’으로 농촌 발전에 헌신했다. 삼애교회 제공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24
지금 돌이켜보면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 대립이 불꽃을 튀기는 중에서, 불과 4년 뒤 닥쳐올 6·25 전쟁이 거의 확실하게 그 징조를 나타내고 있던 해가 아니었나 생각되오이다.

‘탁치’를 반대하는 우익의 운동은 어느새 탁치 자체의 가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친미반소 운동으로 변질돼 갔으며, 따라서 탁치를 찬성하는 좌익의 운동은 불가피하게 반미친소 운동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는 양상이 되었소이다. 이 통에 일단 3월에 열렸던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돼 5월에는 무기휴회로 들어갔으니 미-소 간의 냉전은 세계 어디서보다 한반도를 무대로 가장 첨예하게 전개되었던 것이었소이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승만 박사는 그해 6월 3일 남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이른바 ‘정읍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에는 북벌 주장도 포함되어 있었사외다. 김구 선생께서 이 박사와 손을 끊은 것이 아마 그때가 아니었나 싶고, 또 몽양 선생께서 위기감을 느끼시면서 좌우합작 운동을 시작하신 것도 그 무렵으로 추측되는 바이외다.

그 불길한 46년을 돌이켜보면 잊을 수 없는 것이, 추수가 끝난 10월 공출 문제로 대구에서 발생한 농민항쟁인데, 치열했던 항쟁 자체보다도 내가 더 충격을 느꼈던 것은 조선어 학자 이윤재 선생의 자제분이 대구경찰서를 습격했다는 죄로 군정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사실이었소이다.

한뫼 이윤재 선생이 누구신지 지금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나, 일제 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잡혀 들어가 함흥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으신 저명한 어학자이신데, 선생을 고문으로 죽인 함흥경찰서 친일 경관이 해방 이후 월남해 대구경찰서 서장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외다. 이 선생의 자제분이 이 사실을 알고 대구항쟁 때 농민들과 합세하여 경찰서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게 된 것인데, 미군정청으로서는 반도(叛徒)는 반도이고 경찰은 경찰이었겠지요. 각계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그 자제분은 사형에 처해진 것이었소이다. 이 선생은 마침 내 누나가 다니던 배화여고 교사였던 까닭에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친일파들의 발호를 규탄하는 큰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소이다.

아무튼 이듬해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있던 어느날, 선친께서 미국에서 돌아오신 배민수 목사님을 만나고 오셨다면서 얘기 끝에 슬며시, 너 미국 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고 물으시지 않아요. 마치 내 마음을 떠보시는 것같이 말이외다.

배민수 목사는 일제 때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 용케 빠져나가 10여년 동안이나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시다가, 해방이 되자 군정청 직원이 되어 돌아오신 분이었어요. 퍽 어렸을 때 선친께서 내 손을 잡으시고 배 목사님 부인이 홀로 아들을 키우며 기약 없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사시던 댁을 가끔씩 찾아가신 일이 있었소이다. 그 댁의 주소가 서대문 근처 홍파동 10번지였다는 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인데, 지금 생각하면 홀로 사시는 부인께 약간이나마 생활비를 건네드리기 위해 찾아가신 것이 아니었겠소이까.

헌데 배 목사가 무슨 이유로 미국으로 망명하셨나, 굳이 감출 필요도 없어 그 이유를 밝히겠는데, 왜 김일성 주석의 부친이 기독교 장로이신 김형직 선생 아니십니까. 이분께서 조직한 민족운동 단체가 국민회였는데, 원래 평양 분이신 배 목사가 거기에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외다. 그 낌새를 챈 일본 경찰이 추적을 시작하자 미국으로 피신했던 것이지요.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물론 훨씬 후의 얘기오이마는.

결과적으로 나는 47년 8월 군정청이 발급한 여권을 가지고 배 목사의 아들과 같은 배를 타고서 미국으로 떠나게 된 것인데,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고 사뭇 나를 권유하시던 선친이나, 또 귀가 솔깃해서 그럼 가마고 나선 나 자신이나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득실상 도무지 계산이 맞지 않는 이상스런 판단을 내린 것이오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고 그냥 서울대 의대에 눌러앉아 공부를 계속한다면 3년 뒤인 50년에는 졸업해 의사 자격을 딸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뭣 때문에 그것을 팽개치고 의대도 아닌 문리대학으로 전학을 할 결심을 하였는지.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내 눈으로 한 번 보고 싶다는 충동의 탓이었을까. 아무튼 미국으로 떠난 것이외다. 떠나기 전 무슨 생각이었는지 안국동에 있는 라세진 교수 댁을 찾아가 작별인사를 드렸는데, 그때 만일 그대로 서울대에 있었더라면 훗날 라 교수처럼 나도 인류학의 대가로 이름을 날릴 수도 있지 않았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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