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상해에서 환국한 뒤 백범 김구 선생이 거처로 삼은 서울 서대문 경교장의 2층 집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47년 8월 필자가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 찾아가 인사를 했던 곳이자 49년 6월 안두희의 저격을 받고 서거한 바로 그 자리다. 백범기념사업회 제공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25
미국에서 내가 나온 학교는 조지아주 애틀란타에 있는 에모리(Emory)대학인데, 이 학교는 구한말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개화운동을 추진하던 윤치호 선생이 나오신 학교이기도 하오이다. 그 학교로 가게된 것은 어려서 다니던 영등포교회의 담임목사이시며, 후에 인천시장을 지내신 박학전 목사님이 주선해 주신 까닭인데, 박 목사는 서울대 장리욱 총장과 교분이 있으셨던 인연으로 그분께서 택해주신 학교가 에모리대학이었던 것이외다.
그때 내가 무슨 서류를 어디다 보내어 입학수속을 했는지 하도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박 목사께서는 당시 한독당과 깊이 연결되어 활약하고 계시던 터라, 박 목사님의 분부로 김구 선생께서 기거하고 계시던 경교장을 방문했던 기억은 뚜렷하게 남아있소이다. 47년 8월 3일 몽양 선생 장례식이 끝나고 출발이 박두했던 어느날 약주를 한 병 사들고 일제 때 이름 그대로 죽첨정(竹添町)이라고 불리던 경교장으로 김구 선생을 찾아가 뵙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작별인사를 올렸소이다. 김구 선생께서는 미국 가서 공부 잘 하라고 격려의 말씀도 해주셨으나, 그때 나는 애송이 학생이었고 선생께서는 이미 칠십 고개를 넘으신 백전연마(百戰鍊磨)의 어르신이 아니시었소이까. 그때의 내가 풋내기가 아니라 그래도 우리 현대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얼마쯤은 짐작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것을 여쭤 보고, 또 나는 나대로 우견이나마 얼마나 많은 말씀을 올렸겠소이까.
그무렵이 어떤 때였나를 상기해 보이시소. 탁치에 대한 찬반으로 날이 갈수록 좌우의 대립이 첨예해지는 가운데 단독정부와 북벌로 향하는 이승만파의 움직임과,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여운형파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46년이 지났고, 이듬해 3월 접어들자 미국은 당시의 냉전은 언제라도 열전으로 돌릴 수 있다는 뜻의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하지 않았소이까. 이승만으로서는 바라고 있었던 것이지요.
한편 여운형은 좌우합작위를 발판으로 일단 무기휴회로 들어갔던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위하여 노력한 결과 그해 5월 21일 제2차 공동위가 열리게 된 것이었소이다. 이 힘겨운 줄다리기에서 여운형파의 세력이 반대파를 누르는 기색이 역력해지자 7월 여운형 선생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흉탄을 맞고 목숨을 잃게 된 것이었소이다.
또 그때 내가 만나 뵌 김구 선생께서는 46년 3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른바 ‘정읍 발언’이 나오자 이승만과는 손을 끊고 그해 10월 탁치문제로 대립 상태에 있었던 몽양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놓고 있던 차에 몽양이 암살됐으니 얼마나 착잡한 심경이었겠소이까. 당신 신변에 닥쳐올 위험에 대해서도 무언가 느끼시는 점이 있으셨겠지요.
그런 처지에서 선생께서 잔뜩 주눅이 든 채 꿇어 앉아 있는 어린 내게 무슨 뜻깊은 화제로 말씀을 하실 수도 없으셨을 터이고. 그때 미국공군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아들 신씨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노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하직인사를 드리고 나왔더이다. 그때 내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49년 6월 안두희가 선생을 시해하는 것이오이다.
다음해 48년 4월 선생께서는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시고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하시게 되는 것인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경교장에서 뵈었을 그 때 이미 선생께서는 남북통일을 위해 38선을 넘으실 결심을 굳히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하는 바이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면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오이까.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꼭 40년 만인 해가 89년인데 그 해 4월, 나는 김구 선생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따라 문익환 목사와 더불어 평양을 방문하고, 남북통일을 다짐하는 4·2공동성명이 세상에 나오게 하는, 말하자면 산파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외다.
문 목사와 내가 평양으로 떠나기에 앞서 <한겨레>에 의탁했던 작별 인사에 관해 이 기회에 간단히 소개해 두고자 하는데, 일행이 북경을 향해 도쿄 나리타공항을 출발한 것이 4월 24일이었소이다. 그 전날, 당시 도쿄특파원이던 이주익 기자를 불러 저녁을 같이 하면서, 우리의 평양 도착이 확인될 26일쯤 발표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인사말씀을 이군에게 맡겼던 것이외다. 그 안에 꼭 40년 전 김구 선생께서 38선을 넘으시면서 국민들에게 남겨주신 한시가 인용되어 있소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지요.
‘내가 걸어가는 눈 덮인 들판길(踏雪野中去)/조심하여 헛 밟지 말지어다(不須胡亂行)/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今日我行跡)/뒤에 오는 이의 표식이 될 것이니(遂作後人程).’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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